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유서를 읽던 날, 이런 저런 사람들과 몇 차에 걸쳐 술을 먹고, ‘세상이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누군가의 외침을 뒤로하고 소호 앞바다에 앉았다. 달빛 속에 바다가 퍼렇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소박한 욕심하나 지켜줄 수 없는 사회가 서럽다.

밀짚모자 눌러쓰고, 막걸리 한잔에 얼굴이 붉어지기를 소원했던 소박한 욕심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이 서럽다.
그렇게 인정머리 없던 사회가 한 사람이 죽고 나니 손바닥 뒤집듯이 변했다. 죽일 것같이 덤벼들던 사람도 몸을 사린다. 권력의 마녀사냥에 침묵으로 동조했던 수많은 사람들도 기다렸다는 듯 설쳐댄다.
‘옳고 그름’이 없는 사회에서, 오로지 ‘살아있는 권력만이 진리’라는 이 사회의 뻔뻔스러움이 말을 잃게 한다.

아내가 불려가고, 자식들이 불려갔다.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 측근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면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승부수가 ‘죽음’이어야 하는 이 사회가 서글프다. 크고 작은 승부 속에 살아왔던 ‘바보 노무현’이 마지막 던진 승부수는 다름 아닌 그의 ‘목숨’이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상고 졸업하고, 판사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기까지 그는 그렇게 자신을 던지며 한 세상을 살았다.
그는 유서에서 ‘원망하지 마라’ 했다. ‘원망하지 마라’는 말을 유서에 담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원망 했을까 싶으니 가슴이 저려온다.
태어났으니 사는 것이고, 살자니 열심스러워지고,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그 모습 속에서 서민들은 그에게 ‘작은 희망’을 보았다.

서민들이 “대통령 나와라!”하고 외치면 “저, 나왔습니다”하며 뒷머리 긁적이며 나타나 손 흔들어 주던 모습 하나로도 그는 서민들에게는 즐거움이었고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영정사진 속에서 혼자 웃고 있다. 무엇이 그리도 좋아서 웃는 걸까. 앞으로 그가 받아야 할 고통이 던져버린 목숨으로 일시에 사라져서 좋다는 뜻일까.

자신으로 인해 받아야 할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혼자 짊어지고 가니 그것이 홀가분해서 좋다는 뜻일까. 아니면 철저하게 놀림거리로 만들겠다는 상대방에게 크게 한방 먹였다는 생각에 혼자 좋아서 웃는 것일까.
좋아 죽겠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뜻 모를 미소로 묻는다. “이제 시원한가?” “내가 죽으니 이제 시원한가?” 묵시적 동의를 해줬던 우리 모두에게 그는 묻고 또 묻는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는 살아있는 권력이 칼끝을 겨누면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를 보았다. 그러나 기가 막혀 죽을 것 같아도, 분통터져 죽을 것 같아도 우리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래의 모습대로 살아갈 것이다.
사회악이 판을 쳐도 ‘살아있는 권력이 곧 진리’라는 비겁함에 매몰되어 우리는 또 그렇게 앞으로를 살아갈 것이다.

힘 있는 자는 ‘살아있는 권력’의 편에 서고, 힘없는 자들만이 ‘죽은 권력’의 편에 서서 또 내일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기가 막혀 죽게 된 절망적 허무뿐인 사회에서 우리는 도대체 뭘 얻어내겠다고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가 ‘죽음’으로 이 사회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던가. 우리 사회가 적어도 이성적인 사회라면 그의 마지막 질문에 모두의 고민이 있어야 한다. 사회정의는 권력 앞에 속수무책인 세상이다. 그러나 오늘도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위해 찾아오는 수많은 추모객들을 보면서 이 땅의 사회정의는 아직 죽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권력 앞에 숨죽이는 사회에서 지금 우리는 군사정권 시절처럼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그래서 아찔하고, 그래서 무섭다.
무소불위의 권력이 어떻게 작용할지 그것을 불안해하는 것이다. 서민은 안중에 없어 보이고 민심의 전달 자체가 철저히 차단된 느낌이다.
반발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우격다짐이 사회 곳곳에 팽배하다. 뻔뻔스러운 비리들이 곳곳에서 발생해도 누구도 “아니요”라고 얘기하기 힘든 세상이다. 그래서 권력과 싸우고, 아닌 것을 보고 “아니요”라고 얘기하기 위해서는 단단히 각오하지 않고는 좀처럼 얘기하기 힘든 세상이 됐다. ‘바보 노무현’이 이를 증명했다.

오늘도 많은 서민들이 그의 죽음 앞에서 서럽게 울고 있다. 슬퍼하지도 말고, 미안해하지도 말라는 그의 마지막 말이 더 슬프고, 더 미안해서 그렇게 울고 있다. 촌놈 노무현, 바보 노무현, 그래서 시대의 냉대와 멸시를 온몸으로 맞이해야 했던 노무현은 갔다.

굵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촛불이 거리 곳곳에서 속울음을 울고 있는 이 때, 항상 “아니요”라는 말을 즐겨하던 그가 영원히 말문을 닫은 이때, 우리도 더불어 말문을 닫아야 할 것인가?

우리 모두는 묻고 답하고, 묻고 답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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