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시리즈 ‘실체하는 부유’ 展

박치호는 자신의 토르소의 모델이 누구인지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그냥 ‘Floating’(부유)란 타이틀을 붙이고 있을 따름이다. 그의 작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토르소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가 작품 모델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익명의 인간으로 덮어두고 싶다는 뜻이며 그렇게 한 데에는 어떤 특별한 뜻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의 토르소는 사지가 없는 그야말로 불완전한 인간을 표상한다. 불완전하다는 것은 본궤도에서 벗어나 있으며 일그러져 있음을 뜻한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타락 후의 인간 모습을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타락으로 인한 인간의 변질을 토르소라는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박치호의 인체는 피부가 짙은 갈색이거나 거무스레하게 그을려 있으며 하나같이 볼품없고 비만하다.

그러나 박치호가 비만형 인간을 풍자하기 위해 이런 모델을 등장시켰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빗나간 판단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가 볼품없는 인체를 등장시킨 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등장인물들의 나이를 추정해 본다면 중년기의 남성과 여성에 해당하는데 그들은 가사와 사회활동, 그리고 자녀 양육을 위해 제대로 자신의 건강조차 관리하지 못한 기성세대를 가리킨다.

작가는 이들이 살아온 삶을 헤아리고 위무하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작품은 매우 사랑스럽고 이타적임을 알 수 있다. 언뜻 보기에 그의 작품은 외면 받기 십상이지만 그러나 작품의 내용에 귀를 기울이면 인간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겉으로는 추하나 속으로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 그림이다. - 서상록 안동대학교 미술학교 교수, 전)평론가협회 회장-

▲ 박치호 작가

GS칼텍스 예울마루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박치호(48) 작가.

‘실체라는 부유’(Floating Existence)라는 주제로 지난 23일부터(내년 1월 3일까지) 예울마루 7층 전시실에서 200호 대형 작품 ‘토르소’ 2점을 비롯해 2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박 작가는 지난 20년 동안 ‘노좆바다’, ‘변색동물’, ‘토르소’ 등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얻어낸 ‘인간 탐구’ 연작 시리즈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이번 전시작 토르소 회화는 인간의 두상과 팔, 다리가 잘린 모습을 통해 상처와 아픔, 고통, 절망으로 점철된 현대인의 자화상을 붓이 아닌 페인트 롤러를 이용해 밀도가 높은 새로운 회화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많은 상처들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들이 작품의 모델이다. 그 실체 위에 작가적 상상력을 더해 익명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내면의 드러나지 않는 상처와 아픔들을 읽어내는 것은 작가의 숙명인 것 같다.”

박 작가는 “물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술이 그에 대항하는 최후의 보루가 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간 탐구에 천착하고 있다”며 “팔, 다리가 잘린 토르소는 내 모습, 우리 사회의 모습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성찰하고 그 속에서 희망을 찾아가야한다는 새로운 사유 체계를 던져 주려는 것이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전통시장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들이 정말 ‘부유’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다. 그는 “토르소는 인간의 형태를 닮아 있지만 팔과 다리, 목이 없다. 그래도 생명력이 느껴지는 것은 상처투성이인 인간의 내면이 어쩌면 저런 모습일 수 있다는 연민이 깊어지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박 작가는 “우리 어머니 세대만 해도 자식을 많이 낳았지만 질병과 가난으로 온전히 키운 자식은 서너 명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자식을 앞세울 때마다 팔·다리 하나씩을 도려내는 심정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견뎌내고 살아가야 하는 이미지가 토르소와 연결돼 있다”고 설명했다.

“인간은 결국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존재다. ‘실체라는 부유’는 말 그대로 떠돌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상처가 생길 때마다 어디론가로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살아내야 한다면 치유가 필요하지 않겠나. 현대인의 상처와 아픔, 고독을 치유하고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것이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내 그림은 정적이다. 평범한 형태에서 더 깊은 이야기가 나온다고 믿는다”며 “우리 삶이 단편적일 수 없듯이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 내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풍부해지길 원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것이 정답이라고 제시해주기보다 작품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삶을 사유하고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 작가는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여수지역 예술 생태계에 대해서도 제언했다. “전력투구하더라도 좋은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기 어려운데, 많은 시간을 생활고와 싸워서는 좋은 작품을 창작하기가 더 어렵다”며 “지역은 수도권보다 예술 활동 기회가 적고 작품 판매 시스템이 열악해 더욱 수입구조가 취약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처절한 고민 끝에 탄생한 예술 작품은 그 순간부터 이미 공공의 선을 위해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면서 “국가나 지자체가 더 이상 스스로 선택하고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예술가들이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 마련을 위해 국가와 지자체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박 작가는 “예술가들은 본능적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헌신적인 정신을 지니고 있다”며 “작품 활동을 위한 최소한의 생태계가 만들어지면 국가와 도시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동력이 될 것이다”고 강조했다.

여수 경도 출신인 박치호 작가는 추계예술대학교를 졸업한 후 지난 1994년 단성갤러리에서 ‘노좆바다’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개인전과 초대전 4회, 여수국제아트페스티벌 등 단체전에 100여 차례 참여했다. 여수지역에서는 천재화가 고 손상기화백의 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를 창립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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