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를 읽으며 충무공을 찾아 나서다 5

“과천의 좌수 안홍제 등이 이상공에게 말과 스무 살짜리 계집종을 바치고 풀려 나오는 것을 보고 나갔다고 했다. 안은 본시 죽을죄도 아닌데도 여러 번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물건을 바치고서 석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이 달려있다고 하니, 이야말로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인가.”

정유년(1597년) 5월 21일의 난중일기이다. 나라의 잘못된 일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장군의 아픈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 타루비 여수시 고소3길 13번지에 위치한 고소대에 보관된 타루비의 모습이다. ⓒ김윤식

여수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소대는 전라좌수영 성채의 장대(將垈)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충무공 이순신이 작전계획을 세우고 군령을 내리던 곳으로, 경치가 아름다워 지금은 여수8경의 하나로 불린다. 하지만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군령을 어긴 황옥천의 목을 베어 군율을 엄히 세운 곳이기도 하다.

고소대 안에는 타루비(墮淚碑)가 모셔져 있다. 장군이 순국하시고 5년 후인 1603년에 막하에 있던 병사와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세웠다는 짤막한 돌비석이다. 참혹했던 전쟁이 끝난 뒤 무능하고 부패한 조정을 향한 민중의 분노가 거셌는데, 장군을 기리며 이런 비를 세웠다는 것은 놀랍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장군이 죽자 백성들이 “마치 자기 어버이를 잃은 듯 통곡했다”고 적고 있다. 바치는 재물의 양이 사람의 없던 죄도 만들고, 있던 죄도 없애는 부정한 현실에 분노했던 충무공의 올곧은 마음을, 백성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 선거전이 시작되었다. 다들 ‘새 정치’를 하겠다고 하신다. 고마운 일이다. 우리가 바라는 새 정치는 소박하다. 그 정치인이 세상을 뜨고 나면, 이름 없는 사람들이 함께 나서서 또 다른 ‘타루비’를 세울 수 있게 하는 정치가 바로 우리가 바라는 새 정치이다. 장미가 피어나는 5월이 기다려진다.

(여수충무고 학생동아리 ‘이순신연구소’ 박인화, 홍지원, 송서연, 김윤식, 정승화, 서지희. 대표집필 김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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