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경 수필가



지난해에 본 거리 풍경인데, 버스터미널 앞 육교에 걸려 있는 현수막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축 납골묘지 개장’

나는 이 광고 문구를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 멍하게 서 있었다. 요즘 살아가다 보면 우리 주변에는 축하할 일도 많다.

옛날에는 주로 봄철의 행사였지만, 요즘에는 사계절의 행사로 변해버린 결혼을 비롯하여 회갑이며 고희 그리고 어린애 백일잔치 등속의 초청장들이 날아와 삭막한 우리의 일상을 즐겁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진심으로 축하해 줄 만한 행사는 한두 건에서 그치고, 나머지는 모두 신경쇠약 촉진제로 우리의 정신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왜냐면 당사자의 이름도 낯선 초청장들이 앞 다투어 집으로 찾아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행사의 주인공들로 봐서는 축하를 받을 만한 일생의 경사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하얀 봉투에는 우리의 속마음과는 다른‘축(祝)’자가 여지없는 장식으로 나붙는다. 봄은 진정 축하의 달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번번이 당황하여 망설이게 된다. 이런저런 직장에서 물러나는 정년퇴직일 경우, 봉투에 무엇이라고 쓰느냐는 친지들의 질문을 받았을 때이다.

요즘은 정년의 나이가 앞당겨져 한창 일할 나이에 직장을 물러나야 하고 보면 처자를 거느리고 살아가야 할 앞날이 막막하기만 하다.
그런 말 못할 아픈 심정으로 식장 단상에 서 있는 주인공에게 무슨 축하할 말이 있겠는가.

그러나 부득이한 본인의 사정으로 도중에 물러나는 명예퇴직이거나 혹은 타의에 의해 밀려나는 불명예퇴직이 아닌, 떳떳한 정년퇴직이고 보면 축하해 주고도 남을 일이다.
그런 유권적인 해석으로 나는 서슴없이‘축 정년퇴직’으로 쓰라는 결정을 내려 주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옛날 나의 중학 시절에는 경조사(慶弔事)에 대한 전보문(電報文)을 선생님이나 선배의 도움 없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서 보내기도 했다.
문구는 간단했다. 경사일 경우에는‘축 결혼’이었고, 그것이 아닐 경우에는‘근조(謹弔)’아니면‘삼가 조의를 표합니다.’였다.

그런데 십여 년 전만 해도 그 당시의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도 그런 전보를 보낸 경험이 없어서인지 수업시간에 한 학생이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전보문 쓰는 요령을 물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되물었다. 그랬더니 어떤 학생의 서슴없는 답변인즉‘축 사망(祝死亡)’이었다. 옳은 말이다. 이 팍팍한 세상살이를 미련 없이 떨쳐버리고 떠났으니 얼마나 마음이 후련했겠느냐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말이다.

물론 웃고 만, 한 학생의 재치 있는 조크이긴 했지만, 더구나 지금은 일상의 모든 일을 인터넷으로 처리해버리는 거두절미(去頭截尾)의 각박한 세상이 되고 말았으니 여기에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우리는 일상의 문학작품 독서를 통해 순화된 정감으로 부모님이나 친구에게 한 줄의 따뜻한 편지라도 쓸 수 있는 세상이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

이제 이 글의 결론을 내려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소슬한 가을바람에 만장(輓章)처럼 펄럭이고 있는 현수막 속의 이 한 구절‘축 납골묘지 개장’의 풀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멍하다.

앞서 떠난 사람들의 죽음을 슬퍼해 주어야 할지, 아니면 축하해 주어야 할지 심경이 착잡해서 나는 한참 동안 육교 난간의 현수막을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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