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여수서 전남 최초 학도병 출전 기념식 열어

1950년 7월 13일 여수·순천 등 학생 183명, 전쟁 첫 자원 입대
9일 훈련 뒤 화개전투 투입, 인민군 정예부대저지 70명 산화
일부 발굴유해, 교육계의 지원 거부로 신원 확인 어려움 따라

6·25전쟁 발발 초기인 1950년 7월 13일 여수와 순천 등 전국 첫 자원 입대한 학도병의 충혼을 선양하기 위한 ‘학도병의 날’ 제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6·25참전학도병충혼선양회는 ‘혈서를 쓰고 전국 최초 자원입대한 전남지역 학도병 6·25출전 68주년 기념식’을 지난 13일 여수시 진남문에회관에서 참전학도병, 국가유공자, 대한민국월남참전자회 전남지부, 육군7391부대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했다.

생존학도병 등 기념식 참석자들은 전국 첫 학도병 183명이 전쟁발발 10여 일 만에 자발적으로 입대해 대부분 장렬히 산화했는데도 전투 현장의 유해발굴 의지가 부족한 데다 ‘학도병의 날’ 제정 또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전국 최초 자원입대한 학도병들의 뜻을 기리는 기념식이 13일 여수 진남문예회관에서 열렸다.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전남지부가 주관하고 전남도와 육군 제7391부대가 후원하는 이날 기념식은 학도병들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혈서를 학교장에게 제출하고 자원입대 했던 그날과 10여 일 후인 7월 25일 경남 하동군 화개장터인근 야산에서 벌어진 첫 전투를 되돌아봤다.

고령에도 기념식에 참석한 생존 학도병 6명에게 감사패와 꽃다발이 전해진 뒤 모두가 일어나 학도병에게 거수경례하면서 충혼의 뜻을 기렸다.

정효명(84) 6·25학도병동지회장은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전남 동부지역 학생 183명이 혈서를 쓰고 자원입대, 학생들은 9일간 훈련을 받고 입대 10여 일 만에 전투에 투입돼 하동서 인민군 6사단과 전투를 벌였는데 70명이 전사했다”며 “그날을 기리는 충혼 행사에 감사드리며, 183명의 뜻을 잊지 않기 위한 학도병의 날 제정을 위해서도 노력해 달라”고 말했다.

6.25참전학도병동지회 정효명 회장(84)은 답사에서 “조국수호를 위해 혈서를 쓰고 자원입대했던 소년들의 충성심에 대해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었는데, 월남전참전 후배들을 비롯한 민관군이 힘을 합쳐 매년 성대한 기념식을 치뤄 이제야 한이 풀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6.25참전학도병충혼선양회 고효주 회장은 “전남지역 학도병들의 화개전투 등 활약상이 6.25전쟁사에 정확히 기록되고, 학도병 가족찿기 및 추가 유해발굴, 충분한 자료수집 및 백서발간, 다큐멘터리 및 극영화 제작 추진 등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 계획을 말했다.

또, “6.25전쟁발발 후 전남지역 학도병들이 가장 먼저 조국수호를 혈서로 다짐하면서 출전한 7월 13일을 ‘학도병의 날’을 정부기념일로 지정해서 수많은 6.25참전 학도병들의 충혼을 계속 선양하고 후대들에게 기억시켜 줄 것을 국가에 청원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한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시작된 직후 7월 13일 입대할 의무가 없었던 여수와 순천, 광양, 보성, 고흥, 강진 등 전남 17개 중학교 15~18세의 학생 183명이 '조국 수호'의 혈서를 교장 선생님과 경찰서에 제출하고 순천에 임시 주둔하던 국군 15연대에 자원입대했다.

이들은 6개 소대의 독립 학도중대로 편성돼 9일간의 기초훈련만 받은 후 전선 투입을 위해 전주로 향하다가 국군의 퇴각에 따라 경남 하동군 화개장터 인근 야산에서 인민군 최정예 부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학도병들은 뒤늦게 받은 M1 소총의 실탄사격 한 번도 못 해본 상태로 국군과 경찰이 퇴각한 화개장터 건너편 야산 진지에서 7월 25일 오전 7시 진주 점령을 위해 섬진강 변을 따라 통과하려던 인민군 최정예 6사단 선봉 대대를 12시간 지연시켰으나 7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이후 일부 유해 발굴 작업이 이뤄지기는 했으나 발굴 유해의 신원 확인을 위해 학적부의 친인척을 확인해야 하지만 교육계가 지원을 꺼려해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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