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여수로’를 순례하며 충(忠)을 만나다.

이순신은 그의 나이 47세인 1951년(선조 24년) 2월 13일 전라좌수사가 되어 전라좌수영인 여수에 부임하였습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 7일 제1차 옥포해전, 6월 2일 제2차 당포해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7월 8일 제3차 한산대첩에서 그 유명한 ‘학날개 전법’으로 일본의 함선 60여 척을 침몰시켰으며, 이어 9월 1일 제4차 부산대첩에서도 100여 척을 격침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1593년 7월 14일 본영을 한산도로 옮길 때까지 이순신은 여수에 2년 5개월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래서인지 여수에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여수시청의 자료에 따르면 2015년 1303만 명, 2016년 1316만 명, 2017년 약 1508만 명으로 관광객의 수가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찾아가는 곳은 엑스포 해양공원, 아쿠아플라넷, 케이블가 등 최근에 만들어진 관광 시설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그곳도 가볼 만합니다. 여수의 아름다운 바다와 어우러진 그곳을 찾으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휴식을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순신을 만나지 않고 여수를 떠나는 것은, 교회에 가서 교회당만 휘 둘러보고 오는 것처럼, 절집에 가서 대웅전도 들르지 않고 사진이나 몇 장 찍고 오는 것처럼,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수에 오시는 분들에게 이순신을 만나게 하는 길을 안내해 드리고자 ‘이순신로’를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그것도 ‘이순신-여수로, 이순신-여천로, 이순신-돌산로’로 나누어 이순신의 삶이 스토리텔링으로 녹아 있는 길을 만들고자 결심하였습니다. 벌써 3년째 이순신을 연구하고 있는 여수충무고등학교 자율동아리 ‘이순신연구소’가 이 일에 발 벗고 나섰습니다. ‘젊은 기자들’이 그 뒤를 따라 취재한 이야기를 3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합니다.

1회 : “죽음을 뛰어넘은 삶, 이순신에게 길을 묻다”
       - ‘이순신-여수로’를 순례하며 충(忠)을 만나다.
2회 : “가족의 울타리를 뛰어넘은 삶, 이순신에게 길을 묻다”
       - ‘이순신-여천로’를 순례하며 효(孝)를 만나다.
3회 : “역사를 뛰어넘은 삶, 이순신들에게 길을 묻다”
       - ‘이순신-돌산로’를 순례하며 의(義)를 만나다.

-‘젊은 기자들’ 8기 특별취재반 ‘이순신-여수로’ 대표기자 김민정
 

▲이순신-여수로.‘여수엑스포역―(약 2.5km, 도보 약 38분)→충민사―(약 2.8km, 도보 약 42분)→진남관―(약 1.0km, 도보 약 15분)→벽화마을―(약 0.5km, 도보 약 7분)→고소대―(약 0.7km, 도보 약 13분)→이순신 광장―(약 0.4km, 도보 약 6분)→꿈뜨락’ 총거리 약 7.9km, 도보 2시간 ⓒ이보겸

“여수엑스포역, 이순신-여수로의 시작”

▲여수엑스포역. 여수 여행의 출발점, 여수엑스포역입니다. 여기에서‘이순신-여수로’순례도 시작됩니다. ⓒ송병훈

젊은 여행객들에게 여수 여행의 시작은 대부분 여수엑스포역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전의 여수역 자리가 2012여수엑스포의 메인 광장이 되면서 2009년 말 지금의 덕충동 자리로 역사를 이전하였는데, 그때 이름도 여수엑스포역으로 바꾸었습니다. 역사(驛舍, 역으로 쓰이는 건물)는 여수세계박람회에 걸맞게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선박 뱃머리의 곡선 이미지를 형상화하였으며, 여수세계박람회광장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여수세계박람회는 2012년 5월 12일부터 8월 12일까지 ‘살아 있는 바다, 숨 쉬는 연안’이라는 주제로 여수에서 개최되었는데, 아직도 볼거리들이 꽤 있습니다. 우선 스카이타워에 들러 바닷바람을 마시며 차도 한 잔 마실 수 있고, 빅오쇼를 관람하며 하늘 물보라에 펼쳐지는 환상적인 바다에 풍덩 빠질 수도 있으며, 아쿠아플라넷에 가서 인어들이 펼치는 판타지쇼부터 터널형 수족관, 마스코트 벨루가까지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지척에 보이는 오동도 또한 지나칠 수 없는 곳, 그 섬에 가면 왜 이 지역이 한려해상국립공원인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충민사, 죽어도 죽지 않은 이순신”

▲여수 충민사. 남향으로 지어진 사당은 아담하고, 나지막한 담장이 둘러져 있습니다. 사당으로 들어가자 이순신 장군께서 친히 우리를 반겨주셨습니다. ⓒ황준혁

우리는 지금 충민사(忠愍祠)로 떠납니다. 1601년(선조 34)에 충무공 이순신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사당입니다. 아산의 현충사(顯忠祠)나 통영의 충렬사(忠烈祠)보다 훨씬 앞서 세워져, 이순신을 모신 최초의 사액(賜額, 임금이 사원·서원 따위에 이름을 지어 편액을 내리던 일) 사당입니다.

선조가 이순신을 싫어했다는 사실은 대부분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선조가 이순신 사후에 직접 왕명을 내려 사당을 짓게 하고, ‘충민사’라는 이름까지 지어서 그것을 새긴 액자를 내리게 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당 명칭이 이순신의 시호를 따서 ‘충무사(忠武祠)’로 지어지지 않은 것이 의아했습니다. 알고 보니, 이순신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의민공 이억기(李億祺)와 충현공 안홍국(安弘國)을 좌우로 배향(配享: 주벽을 먼저 제사 지내고 배향은 나중에 제사를 지냄)되었기 때문에 충민사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 분을 함께 모신 사당입니다.

의민공 이억기는 임진왜란 때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 장군과 연합 함대를 이루어 일본 함대와의 여러 해전에서 크게 승리하였는데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하신 분이고, 충현공 안홍국 또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으로 활약하다 안골포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다 전사하신 분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 또 다른 ‘이순신들’입니다.

▲충민사 하마비. 충민사 앞에서는 누구나 말에서 내려 경건함을 나타내라며 건립된 하마비입니다.‘하마비’라고 음각되어 있는 글자를 만졌더니 왠지 뭉클한 것이 올라왔습니다. ⓒ 황준혁

나오면서 우리는 충민사 하마비(下馬碑) 앞에 오래 서 있었습니다. 하마비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하마비가 세워진 곳 앞에서는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돌비석입니다. 주로 궁궐이나 종묘 같은 곳에 세우는 하마비가 충민사 앞에 있다는 것은, 충민사가 궁궐이나 종묘만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전에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신분이 높았을 텐데, 충민사 하마비가 바로 그들에게 “말에서 내리라!”로 명령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순신의 호국충절을 우러러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오늘을 사는 우리 시대의 지도자들에게 충민사 하마비는 ‘잠시 말에서 내려’ “충무공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지침으로 삼아 이 난국을 타개해 나가라는 역사적 명령을 내리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남관, 죽어서 나라를 살린 이순신”

▲여수 진남관. 선조 31년(1598)에 전라 좌수영 객사로 건립한 것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 중심 기지로서의 역사적 의미가 큽니다. 망해루(望海樓) 뒤로 보이는 것이 보수 공사 중인 국보 제304호 진남관입니다. ⓒ고기용

여수에는 유독 ‘진남(鎭南)’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진남초등학교, 진남여자중학교 등 학교 이름에도 ‘진남’이 사용되고, 여수를 대표하는 축제 이름도 ‘진남제’입니다. 진남은 ‘남녘을 진압하다’는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당시에 일본을 진압한다는 것은 곧 백성들의 삶을 평안하게 만드는 출발점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여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진남관(鎭南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겸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으로 사용했던 진남관은 원래 ‘진해루’라는 누각이었습니다. 이후 1599년 이순신의 후임인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진해루 터에 75칸의 대규모 객사(客舍, 나그네들이 묵을 수 있는 객지의 숙소)를 세우고, 진남관(鎭南館)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1716년 화마를 입은 진남관은 2년 후 전라좌수사 이제면에 의해 중건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다시 진남관은 2015년부터 보수 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임진년 초6일(을미) 맑음
진해루에 나가서 공무를 보고 나서 군관들에게 활쏘기 훈련을 시켰다. 아우 여필을 전별(餞別, 떠나는 사람에게 잔치를 베풀어 작별함)했다.

계사년 초4일(정사) 맑음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건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祝壽, 오래 살기를 빎)의 술잔을 드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으로 남을 것이다. 우수사 및 군관들과 함께 해루에서 활을 쏘았다. 순천 부사도 와서 군사 일을 약속하였다.

난중일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순신은 진해루(현 진남관)에서 공적인 업무뿐만 아니라 활쏘기도 즐기고 그의 아우 여필을 전별하기도 하는 등,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일찍이 “若無湖南 是無國家(약무호남 시무국가)”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만일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임진왜란의 막바지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호남민초들이 뱃길을 잡아주고 군량미도 조달해 주었으며, 더욱이 나라가 부르면 ‘수군’으로 나가 그 목숨을 기꺼이 바치기까지 하였습니다. 원균에 의해 패망된 수군을 복원하여 7년간의 긴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호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진남관’을 보고 있으면, 어쩌면 이 문장을 “약무여수 시무국가”로 고쳐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여수 사람들의 자부심입니다.

“천사벽화마을,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신 이순신“

▲천사벽화마을. 벽화골목이 시작되기 전 마을 담벼락을 따라 이순신의 생애가 짧은 글과 함께 벽화로 그려져 있습니다. ⓒ김민정

충민사, 석천사, 고소대가 우리의 선조들이 이순신 장군을 기억하는 방법이라면 벽화마을은 오늘을 사는 여수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을 기억하는 방법입니다. 2012년 여수엑스포를 계기로 여수시의 협조를 얻어 고소동 주민들은 담벼락에 벽화를 채우고 장군 이순신을 마을로 모셔 들였습니다. 진남관부터 고소동 언덕을 지나 여수해양공원에 이르는 길이가 1004m라서 ‘천사벽화골목’이라고 부릅니다.

골목은 7개 구간으로 나뉘어 여수엑스포 주제인 ‘해양’에 관련된 벽화를 비롯해, 여수지역 역사와 문화, 풍경 그리고 이순신 장군과 수군들에 관한 벽화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또한 진남관과 벽화마을을 이어주는 다리의 양옆을 보게 되면 이순신장군의 일대기와 함께 그의 효심과 충성심, 그리고 인간성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만, 임진왜란 당시에 장군의 인품에 감복한 여수 사람들은 거북선에서 노를 저으면서 서로의 발목을 끈으로 묶어 도망 갈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채 그렇게 목숨을 던지셨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벽화를 보면서 골목을 걷다 보면 일반 전시회에서 보는 그림과 또 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동네를 아끼고 사랑하는 고소동 주민들의 깊은 마음과 함께, 이순신과 전라수군들의 모습을 기억하는 여수 사람들의 간절함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고소대, 민중의 수호신으로 추앙받는 이순신”

▲고소대. 벽화마을 중간에 있는 고소대의 모습입니다. 여수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소대는 전라좌수영 성채의 장대(將臺, 장수의 지휘대)로 사용되던 건물로, 충무공 이순신이 작전계획을 세우고 군령을 내리던 곳입니다. ⓒ김민정

벽화로 인해 생기가 돋아나는 아름다운 벽화마을을 걸으며 주변을 보니 옛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곳이 바로 고소대(姑蘇臺)입니다. 옛날에는 이곳에 ‘고소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정자는 사라지고 지금은 대첩비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대첩비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47년에 건립된 것입니다.

비각 안에는 통제이공수군대첩비, 타루비, 동령소갈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순신 장군을 위한 비석인데 난중일기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세 개의 비석이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후 세운 비석이기 때문입니다. 비석은 관료들이 살아생전에 자기 권력을 이용하여 세우는 게 일반적입니다. 비석을 세우면서 백성들의 고혈을 짠 끔찍한 이야기를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석들은 하나같이, 장군이 돌아가신 후에 장군의 인품과 충절에 감복하여 백성과 부하들이 자발적으로 세웠습니다. 죽은 후 비석을 세울 정도로 큰 공을 세우며 부하에게 인정받는 훌륭한 인물이 바로 이순신이라는 말입니다. 여수 사람들이 장군을 가리켜, ‘죽어서 다시 살아난 분’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타루비와 통제이공수군대첩비. 타루비(보물 제1288호)는 이순신이 타계한 뒤 1603년에 좌수영의 군인들이 이순신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로, 통제이공수군대첩비(보물 제571호) 바로 옆에 있습니다. ⓒ김민정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는 전라좌수사를 지낸 이순신 장군의 부하였던 유형(柳珩, 1566~1615)이 보내 준 황해도산 돌을 사용하여 건립한 비석으로, 옥포·한산·명량·노량 등지에서 충무공이 세운 공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첩(大捷)은 크게 이긴 대승을 뜻하는 말로, 장군으로서의 지략과 위대함이 이 비석에 담겨 있습니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는 1973년 5월 4일 보물 제57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타루비(墮淚碑)는 이 지역의 장졸들이 충무공의 유적을 밟을 적마다 눈물을 흘린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603년(선조 36년) 세운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업적이 아닌 덕을 추모하기 위해 이순신 장군의 부하들이 선조 임금께 부탁드려 세운 비석이라고 합니다. 타루(墮淚)는 눈물을 흘린다는 의미를 지닌 말로, 장군의 고결한 인품이 이 비석에 담겨 있습니다. 타루비는 1998년 12월 4일 보물 제128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동령소갈비(東嶺小碣碑)는 대첩비의 설립 경위와 여기에 참여한 인물들, 건립하기까지의 어려움 등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는 비석입니다. 이 비석은 1698년 숙종 24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이순신광장, 불멸의 존재로 기억되는 이순신”

▲이순신광장. 뒤로 거북선이 보이는 이순신광장은 진남관 바로 앞에 있습니다. 여기에 설치된 11개 기둥은 이순신 장군이 지휘한 해전을 상징하는데, 밤에는 불빛이 들어와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문서희

이순신광장을 찾았습니다. 광장은 이순신 장군이 작전 계획을 세우고 군령을 내리던 진남관 바로 앞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구조물은 원형에 가깝게 재현한 거북선입니다. 우리는 이 광장에서 매년 진남제라는 축제를 거행하며 이순신을 추억합니다. 진남제(지금의 거북선축제)는 5월 4일 거북선이 출정한 것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축제로, 전야제에는 이순신의 위대한 삶을 보여주는 행렬이 펼쳐집니다. 축제는 5월 4일이 들어 있는 주의 금, 토, 일요일에 거행됩니다. 이 축제는 여수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재밌는 볼거리를 제공하고 이순신 관련 체험활동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광장은 현대와 과거를 잇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순신광장에 11개의 기둥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저 기둥이 무엇을 의미할까 싶어서 여수관광안내소를 찾았습니다.

- 이순신광장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잇는 장소인가요?
“이순신광장에 이순신 동상을 설립하기 위해 먼저 발굴 작업부터 했습니다. 발굴 작업을 통해 예전에 이 장소가 굴강 자리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굴강이란 쉽게 말해서 배를 만들고 정박시키는 장소인데, 이를 통해 방답진 선소뿐 아니라 이곳에서도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거북선은 세 척인데 전라좌수영 선소인 이곳에서 그중 한 척을 건조했으며, 저기 거북선이 있는 위치가 바로 전라좌수영 선소가 있던 곳입니다.”

- 이순신광장에 11개의 기둥이 있던데요?
“이순신광장에는 11개의 기둥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잘 모르고 보면 그냥 설치물 같지만 실제로는 11개의 해전을 상징합니다. 기둥에는 한자와 한글로 각각의 해전을 간략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1개의 기둥은 안골포해전, 한산도대첩, 장림포해전, 부산포해전, 을포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사천해전, 적진포해전, 합포해전, 옥포해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밤에는 여러 가지 색상의 빛이 들어와 아름다움을 더합니다. 예전에는 바닥으로 바닷물이 들어오게끔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꿈뜨락 몰. 이순신 광장 근처 중앙쇼핑센터 2층에 자리하고 있는 청년몰입니다. 청년이 일어서야 나라가 일어섭니다. ⓒ고기용

배가 고팠습니다. 하지만 아무거나 먹을 수는 없는 일, “이순신이라면 어디에 가서 식사를 하셨을까?” 하고 서로에게 물으며 찾아간 곳이 ‘꿈뜨락 몰’입니다. 이순신광장에서 조금 걸어가면 중앙쇼핑센터 2층에 청년몰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2018년 7월 12일 문을 열고 우리에게 볼거리, 즐길 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청년몰은 20개의 음식점과 10개의 서비스 판매점 등, 총 30여 개의 점포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여수시 청년지원센터가 함께하는 이곳에는, 수십 명의 젊은 사장님들이 취업절벽을 뛰어넘어 미래로 힘차게 도약하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다 보니, 사람들이 이곳을 잘 모릅니다. 청년몰 30개 지점 중 ‘바른생활’(추억물품 판매점)의 방준용 사장님을 만났습니다.

- 꿈뜨락 몰은 여수시가 청년들을 지원하는 사업이라고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날이 갈수록 청년들의 취업문이 좁아지고 있지만, 취업도 그렇지만 젊은이들이 창업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여수시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청년지원센터를 만들어 청년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창업에 필요한 아이디어와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창업할 수 있습니다.”

- 꿈뜨락 몰에 어떻게 해서 지원하게 되었어요?
“여수에는 끼와 재능이 넘치며 도전정신이 강한 청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만한 공간이 마땅치 않은 게 현실입니다. 더욱이 여수는 관광명소임에도 불구하고 먹을거리와 즐길 거리가 부족합니다. 본인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일자리도 만들고 관광객들에게 즐길 거리를 제공하고자 하는 여수시의 취지에 호감을 느껴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 취지는 좋으나 여태껏 시도되지 않았던 사업인데 두려움은 없었나요?
“두려울 게 뭐가 있나요. 시도된 적이 없기에 더 재미있지 않을까요? 청년들은 그들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았으니까요. 이순신 장군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모습이야말로, 우리 젊은이들이 본받아야 할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친구들끼리 둘러앉아 국수를 시켜 먹으며, 우리는 참으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그때 문득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삶이 담긴 ‘생활신조’ 몇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랐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마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배를 막았다.”

상황을 탓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장군의 명언을 꿈뜨락의 젊은 사장님들이 멋지게 실천해 내는 그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순신-여수로의 긴 순례를 마칩니다.
 

▲진남관에서 젊은 기자들 8기 특별취재반 (왼쪽부터) 남초은, 문서희, 김민정, 강민혁, 황준혁 기자 ⓒ송병훈

기사작성 : 젊은 기자들 8기 ‘이순신-여수로’ 특별취재반 김민정, 강민혁, 고기용, 남초은, 문서희, 황준혁 기자

덧붙이는 말 : 이순신로를 순례하지 않고서 여수를 안다고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이순신로를 순례하는 것이 들불처럼 번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여수 하면 이순신, 이순신 하면 이순신로 순례, 이런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게 될 날이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우리가 만든 ‘이순신-여수로’는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다듬을 것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지난여름 그 무더위 속에서도 수없이 순례를 떠나야 했던 ‘내 친구들’에게 “정말 수고했다!”며 등을 토닥여 주고 싶습니다.

(‘젊은 기자들’ 8기 특별취재반 ‘이순신-여수로’ 대표기자 김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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