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 “현재의 고통…최선 다해 공판 진행하겠다”
검찰 “당시 판결서 없어 4·3처럼 공소기각 될 수도”
변호인 “당시 내란죄 실체 판단하면 명예회복 가능”

1948년 여수와 순천 등에서 발생한 여수·순천 10·19사건(여순사건) 당시 반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한 민간인 희생자를 대상으로 한 재심 첫 재판이 71년 만에 시작됐다. 과거 국가폭력을 사법적 판결로 인정받아 유가족의 한을 풀 수 있을지 주목된다.

광주지법 순천지원 제1형사부(부장판사 김정아)는 29일 오후 2시 316호 법정에서 내란 및 국권문란죄 혐의로 사형이 선고된 장모씨 등 3명의 유족이 낸 재심사건에 대한 첫 공판준비기일을 열었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은 대한민국 국민이 풀고 가야할 아픈 과거로, 단순한 과거사 아닌 각자의 기억에 선명히 새겨진 현재의 고통임을 안다”며 “최선을 다해 공판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최소한의 절차도 없이 사형이 선고되고 판결서도 없는 상황이란 점에서 재심이 가능한지도 의문스럽다”며 “유족의 보상과 사과, 명예회복 등을 위해 국가가 해야 할 책무 등을 놓고 법원의 고민이 있고, 최선을 다하겠지만 재판 결과가 유족에게 위로가 될 것인지 두려움이 앞선다”고 했다.

▲ 29일 여순사건 유족회와 여순사건재심대책위원회 등 200여 명이 광주지법 순천지원 앞에서 집회를 열고 여순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여수신문 김병곤 기자)

검찰은 이번 사건에 대해 “대법의 재심결정이란 역사적 의미를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향후 형사소송 절차를 통해 실체적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책임감 있게 공소유지를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어 “검찰은 사법적 절차에 따라 당사자들의 유무죄를 판단하되 전제는 공소사실의 유죄 근거가 특정되어야 한다”며 “하지만 판결서도 없는 상황에서 선고이유를 알 수 없고, 선고의 정당성도 어려울 수 있어 제주 4·3처럼 공소기각 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럴 경우 사법적 판단을 할 수 없게 되고 실체적 사실 규명과 희생자의 명예회복도 빛이 바래게 된다”고 말했다. 아울러 “실체적 진실규명을 위해 당시 군법회의 결과 등 전반적인 자료를 수집 중이며, 육군 TF팀과 협력하고 있다”면서 “사건 후 70여년이 경과하고 6·25를 치르면서 재판자료 소실 가능성도 크지만 역사적 진실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유족 변호에 나선 김진영 변호사는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피고들의 죄명인 당시 내란죄의 실체에 대한 판단이 있으면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판결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며 “검사는 공소유지에 최선을 다해 달라”고 요청했다.

재심청구인인 장경자씨(73·여)도 이 자리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장씨는 “여수와 순천 등에서 수많은 사람의 죽음이 묻혔고, 반란이란 불명예와 연좌제로 고통받아왔다”며 “2만~3만 명이 죽어갔지만 저 혼자만 아버지가 빨갱이가 아니라고 싸우고 있다. 어서 명예회복을 시켜 달라”고 말했다.

또 “명예회복이 된다고 한들 돌아가신 분들이 살아 돌아오겠느냐”며 “생명은 고귀한 만큼 빠른 시일 내에 이번 사건을 해결해 달라”고 재판부에 호소했다. 이에 재판부는 “최선을 다해 공판을 진행 하겠다”고 했다.

재판부는 오는 6월 24일 2차 공판준비기일을 열고 사망한 재심 청구인 2명에 대한 재판 진행절차를 심리할 예정이다.

▲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우리나라에서 LIFE의 특파원으로 활동했던 칼 마이던스(Carl Mydans)가 찍은 사진.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 일부가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한 제주 출병을 거부하면서 발생했다. 이후 정부군의 진압과 사후 토벌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과 군경 일부가 희생된 사건이다.

당시 순천 시민이었던 장모씨 등은 국군이 반란군으로부터 순천을 탈환한 직후 반란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체포돼 22일 만에 군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곧바로 사형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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