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낮의 온도가 30도를 넘는 폭염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날 점심을 골라먹는 것도 여간 고역이 아니다.
그래서 요즘은 점심 식사 약속을 스스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저 편하게 간단히 해결하는 경우를 택한다.

얼마 전까지 수첩에 2주 앞의 점심, 저녁 약속을 빽빽이 채우고 거기에 따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서 180도 전환한 것이다.

요즘은 하루를 꼬박 투자해야 하는 골프 약속도 어지간하면 거절이다. 조금은 여유롭게 살기로 작심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도 약간의 용기도 필요했다. 그러나 그 용기가 요즘은 여러 가지 이로운 것들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신문사 일을 시작하고부터 연일 시간과의 싸움이 계속된다. 혼자만의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는 날이 계속되다보니 뒤돌아 볼 겨를도 없다.
어느 날부터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있을 때, 우연히 펼쳐든 책에서 '약속 만들기'에서 '약속 따라가기'로 전환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글을 읽고, 공감하는 바가 컸다.

그래서 당장 스스로의 삶을 한번 우연에 맡겨보자는 시험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늘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누군가 갑자기 "점심 같이 먹을까?, 저녁 식사는 어때?"하고 물어 와도 이미 정해진 약속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누군가 갑자기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저녁에 보자고 할 때, 그런 우연에 부담 없이 따라가 보자는 호기심도 발동했다. 우연과 즉흥에 내맡기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결과가 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저녁 약속을 비워놓고, 간혹 가던 주말 골프 약속을 비워두니, 요즘은 그래도 삶의 공간에서 여유라는 단어를 골라낼 수 있어 좋다.
저번 주말 저녁에는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가족들과 오붓한 외식을 했다. 아내나 아이들이 놀라는 표정에서 그동안 가장으로써 직무유기가 심했다는 자책까지 찾아온다.
이렇게 시간을 비워둔다는 것이 가끔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주는 경우도 있다.

항상 바쁘다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 주위에는 직위가 높을수록, 하는 일이 많은 사람일수록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직위가 높을수록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성인들의 말이 요즘 들어 부쩍 가슴에 와 닿는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하기 쉽다. 자동차를 과속하면 사고가 나고, 공사를 급히 서들면 부실이 된다.
빨리빨리 서두르다보면 무리수를 두게 마련이고, 무리수는 결국 합리성의 결여와 함께 도덕성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뜨거운 여름날에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우리는 남보다 먼저, 남보다 빠르게, 남보다 서두르지 않으면 낙오한다는 강박관념 속에 숨 가쁘게 살고 있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으려니 마음은 급하고 몸은 쉽게 지친다. 조금만 여유를 부리면 뒤지는 것 같아 불안하기까지 한다.

속도의 대열에서 낙오하면 손해를 보고, 생활의 여유를 누릴 수 없으니 누구나 속도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생은 흔히 마라톤에 비유된다. 마라톤은 속도조절이 우승의 관건이다.
힘이 넘친다고 처음부터 질주하면 얼마동안은 앞서 달리겠지만 쉽게 지쳐 곧 뒤지게 마련이다.

평생 가야할 인생의 길에 조급함은 금물이다. 울림이 큰 대종(大鐘)은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말이다.

원목을 재목으로 다듬으려면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후한서에 나오는 경구다. 크게 될 사람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대기만성이다.
이러한 말은 마냥 여유를 부리자는 것이 아니라 서두르지 말고 재능을 갈고 닦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길을 나서면 지름길도 있지만 인생의 길엔 첩경이 없다.

어차피 주어진 삶의 길목에서 쫓기듯 서두른다고 해서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앞만 보고 무섭게 질주하지 말자.
나만 생각하지 말고 이웃도 살펴보는 여유도 필요한 법이다. 문장에 쉼표가 없으면 호흡이 가쁘다.

삶에도 쉼표가 필요하다. 살아가기가 빡빡한 세상, 잠시 삶의 쉼표를 찍고 자신과의 만남의 시간을 가져볼 생각이다.
그 속에서 어쩌면 삶의 여유를 발견하고, 느림의 아름다움이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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