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성 부영여고 교사
순천대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친구가 책을 보냈다. 루쉰의 『야초(野草)』를 우리말로 옮긴 『들풀』(한병곤 옮김, 그린비)이라는 책이다.

차라리 우리말로 글을 쓰고 말지, 다른 나라 말을 우리말로 옮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알고 있는 바. 고생했다는 말을 진심으로 전해 주었다.

루쉰 없이 중국의 5.4혁명을 논할 수 없고 중국 현대 혁명을 논할 수 없다는 저 위대한 사상이, 어떻게 글에 녹아 있을까 궁금했다.

루쉰의 ‘피와 살’을 가장 많이 드러낸 작품집이라는 이 책에서 나는, ‘따뜻한 냉소주의자’ 루쉰을 만났다. 절망적인 세계를 냉소하면서도,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루쉰이 거기 있었다.

이를테면 이렇다. 이 책에 실려 있는 「희망」이라는 작품에는, 헝가리의 혁명 시인 샨도르의 시가 인용되어 있다.

희망이란 무엇인가? 창녀.
그는 누구에게나 웃음 짓고, 모든 것을 준다.
그대가 가장 큰 보물─
그대의 청춘을 바쳤을 때, 그는 그대를 버린다.

늘 우리를 배반하기에 ‘희망’을 ‘희망’이라고 부른다는 말인가? “절망이 허망한 것은 희망과 마찬가지이다.”라고 계속 말하는 샨도르를 향해, 하지만 루쉰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아직도 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허망’ 속에서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면 나는, 여전히, 저 스러져 버린, 애닯고 아득한 청춘을 찾아야 하리라.”라고.

루쉰 스스로가 “청년들이 의기소침한 데 놀라 「희망」을 썼다”고 한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 읽기가 미안해서, 책을 몇 권 주문했다. 그러고서 고마운 사람들에게 한 권씩 건넸다. 먼저, 옆자리에 앉아 있는 동료에게 책을 건넸다.

아직도 ‘청년 교사’의 기품을 잃지 않아서. 아이들과 상담하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학생들을 끝까지 ‘대화의 상대’로 동등하게 여기는 모습이 너무나 고마워서. 거기에 희망이 보여서.

그러고 우리 반 한 아이에게 이 책을 건넸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가를 이미 알아 버린, 그래서 상처투성이가 된 마음을 안고 사는, 하지만 그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서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그 아이에게.

그래도 아직은 견딜 만하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나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책을 건넸다. 아이는 책을 받고, 활짝, 웃었다.

그런데 이 책을 전할 고마운 분이 또 생겼다. 이야기하자면 좀 길다. 가슴에 종양이 있는데도,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아프면 울기만 하는 아이가 우리 반에 있다.

종양은 계속 자란다는데, 아득했다. 그래서 도와 달라고 했다. 몇 년 전 그분 따님을 가르쳤다는 그 인연 하나로 ‘다짜고짜’ 부탁을 드렸다.

그런데 그 아이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종양 제거 수술을 마치고 오늘 퇴원하게 되었다고. 앞으로 통원 치료만 받으면 된다고.

그러면서, 퇴원 수속을 밟으려니, 그분이 이미 계산을 끝냈더라고. 어쩌면 좋겠느냐고. 절망에서 희망을 본 아이 어머니는 울먹이셨다.

고마웠다. 「희망」이라는 글이 담긴 이 책을 건네 드려야겠다. 여천제일병원 강병석 선생님께도.

박용성 부영여자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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