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호 경 수필가

‘젖’은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애가 꼬막손으로 미래의 꿈을 주무르며 빨아먹는 사랑의 밥인가 하면, ‘젓’은 나이가 든 어른들이 밥숟가락에 얹거나 걸쳐서 먹는, 짜고 고소한 감동의 반찬이다.

이와 같이 ‘젖’과 ‘젓’은 맞춤법과 뜻과 정서가 각각 다른데도 우리는 일상의 글에서 우리말을 조심성 없이 붓 가는 대로 마구 써버리니 글의 문의파악에 잠깐이나마 혼동이 일어 우리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든다. ‘젖’이나 ‘젓’이나 둘 다 눈을 지그시 감고 먹는 얼굴표정은 비슷하지만, 각각 맛의 깊이와 색깔이 다르니 하는 말이다.

속담사전에 보면 “젓갈가게에 중이라.” “눈치가 빠르면 절에 가도 젓갈을 얻어먹는다.” “절이 망하려니까 새우젓 장수가 들어온다.”는 등 젓갈에 관계되는 속담이 더러 올라 있는 것을 보면 절에 사는 중은 말고,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젓갈을 즐겨 먹은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 집 식구는 내가 어려서부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젓갈을 좋아해서 이런저런 젓갈이 매번 밥상에 올라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는 옛날의 그 맛을 잊지 못해 재래시장의 젓갈가게를 자주 찾는다. 기왕 젓갈과는 평생의 인연을 맺어왔으니 여생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것의 성분을 알고 먹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새삼 인터넷을 검색해 봤더니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었다.

단백질이 풍부하고 소화효소가 많아 속탈이 났을 때 민간요법에 쓰이곤 했으며, 단백질 소화효소와 지방분해효소를 다량 함유하고 있어서 쌀밥을 주식으로 할 때 부족하기 쉬운 필수아미노산 즉, 라이신과 트레오닌을 보충해주고, 간 보호와 비타민B 보급에 좋다.

지금까지의 감동적인 젓갈 맛과는 달리 건조한 설명문이 맛도 재미도 없어서 검색을 후회했지만, 손을 댄 김에 그 종류도 알아봤다. 수십 가지인 데다가 또한 지방에 따라 달라서 다 열거할 수가 없으니 일상의 밥상에 자주 오르는, 가장 친근하고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여기 들어본다. 먼저 새우젓을 비롯해서 어리굴젓, 갈치속젓, 꼴뚜기젓, 밴댕이젓, 멸치젓, 창난젓, 대구아가미젓, 대구알젓, 고록젓, 황석어젓, 자리젓 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내가 어렸을 때 밥상에 자주 올랐던 젓갈은 멸치젓이었다. 이는 도시나 시골을 막론하고 어느 가정에서나 맛볼 수 있는 가장 흔하고 보편적인 젓갈이다. 다른 젓갈을 먹을 때는 그렇지 않은데, 멸치젓은 잘라서 잘게 만들지 않고 삭은 알몸을 통째로 그릇에 담아 밥상에 올려놓으니 먹을 때 입 주변을 어지럽히지 않고 얌전히 입안으로 몰아넣도록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젓가락으로 멸치 잔등을 집어올림과 동시에 우리의 혓바닥은 멀리 십리 밖으로 마중을 나간다. 촌스럽고 볼모양은 없지만, 나는 이것이 멸치젓갈을 먹는 한국 사람의 정겹고 바른 예의인 줄만 알고 나도 무조건 따라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의 조용한 지적에 이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 뒤로는 의기소침해져 한동안은 밥상위의 멸치젓갈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지만, 이도 하루 이틀이지 그 맛을 알면서 외면할 수가 없어서 참다못해 아버지의 지적을 재삼 명심하고 원위치로 복귀했다.

김치는 남도의 김치이고, 그 가운데서도 여수의 김치 맛을 으뜸으로 꼽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갈치속젓’의 오묘한 맛 때문이다. 처음에는 배추김치에서 시작했던 것이 지금은 갓김치로 넘어와 그 맛이 미국에까지 소문이 나서 수출까지 하고 있다니 갈치속젓의 맛은 그 누구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내 고장 영혼의 맛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젓갈은 ‘볼락젓’인데, 이는 담가서 익히기가 하도 까다로워서 자칫하면 실패하고 말아 고도의 기술과 인내가 필요했다. 그래서인지 이 젓갈은 대량생산의 상품화는 불가능하고 가정에서 오랜 경험으로 익힌 주부들의 손맛으로 끝나는데, 우리 집에서도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몇 년 만에 딱 한 번 성공하여 간신히 맛볼 수 있었던 그때가 하도 감격스러워 집사람이 가계부에 그 방법과 날짜를 적어놓고, 8월 15일 광복절 못지않은 기념일로 삼고 있다.

최근 언젠가 집사람의 장보기에 따라갔더니 생선가게 한쪽에 어느 할머니가 조그만 그릇에 젓갈을 담아놓고 앉아 있었다. 무슨 젓갈이냐고 물었더니 생전 처음 듣는 ‘배다구젓’이라면서 조금밖에 안 남았으니 얼른 털어가라고 했다. 집에 와서 보니 고기 생김은 밴댕이 비슷했는데, 양념을 다시 해서 먹어보니 ‘볼락젓’보다 더 고소하고 맛이 있었다. 생긴 모양은 그저 그런데도 젓갈 맛은 이것을 따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 처음 만난 이 ‘배다구젓’으로 줄곧 한 달이 넘도록 밥맛을 즐기고 있다.

무슨 생선이 됐건 우리나라 고유의 젓갈에는 나의 오랜 삶과 추억이 배어 있으며, 나아가서 이는 또한 우리 민족의 혼이 담겨 있는 맛의 텃밭이요 고향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젓갈의 맛을 문학작품에 빗대어 말한다면 시나 소설의 맛이라기보다 짭짤하고 고소하고 정겨운 것이 수필의 맛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뉴스탑전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