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에서 서울로 직행하는 버스는 고속버스이지만, 여수에서 서울에 바로 이웃해 있는 분당으로 가는 버스는 순천에 들러서 다시 많은 손님을 태우고 가기 때문에 가는 길은 다 같은 고속도로이면서도 명칭은 시외버스이다. 순천은 벌교, 보성, 고흥, 광양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사통오달의 교통중심지이어서 열차나 버스 대합실에는 언제나 승객이 붐빈다. 그래서 나는 시골 사람들과 버스에 동승해서 한나절을 뭉개다보니 이런저런, 정겹고 재미있는 차내 풍경을 많이 구경한다. 그래서 나는 KTX나 고속버스보다 시외버스가 더 마음에 든다.

추석이나 설날이 가까워 오면 요즘에는 자식들이 시골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교통 혼잡을 피해 부모가 거꾸로 상경하는 역귀성으로 형태가 더러 바뀌고 있다. 그래서 이번 추석에 우리 내외도 분당으로 가서 자식들과 함께 추석을 쇤 다음날 시골집으로 내려가기 위해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더니 예상대로 많은 시골 사람들로 붐볐다. 평일에도 그랬지만, 추석 직후의 이 터미널에는 연로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이들이 앉아 있는 대합실 자리에는 인천국제공항에서 보는 바퀴 달린 신식가방이기보다 시골 예식장에서 선물로 얻은 분홍색 보자기가 더 많이 눈에 띄었다.
내가 버스 짐칸에 큰 가방을 밀어 넣고 버스에 오르니 할머니는 벌써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고, 할아버지는 창 쪽에 붙어 있는 좌석번호를 확인하기 위해 엉거주춤 서서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글자가 보여야 제 자리를 찾아 앉지.”
앉아 있던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말을 받아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이 자리가 맞다 말이요.”
“나는 글자가 안 보이는디…”
“안 보이면 그만두시오.” 할머니는 매정스럽게 딱 잘라버렸다.
“인자는 눈도 잘 안 보이니 내가 죽어야지 더 살아 뭐 하겄소.”
뒷자리에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은 같은 늙은이에게 동정을 구하고자 하는 표정이었다. 앞자리에 앉아 머리만 보이는 할머니가 당장 그 할아버지의 말을 받아 박살을 내버렸다.
“허허, 없는 살림에 혼자만 오래 살겄다고 날마다 쓰디쓴 보약을 한 사발씩이나 뒤집어쓰는 저 영감 말하는 것 좀 보소이. 무슨 염치로 저런 소리가 쉽게 입에서 나온다요?”
버스는 서울요금소를 지나 남행고속도로를 한참 달리고 있는 동안에도 그 노부부는 나란히 앉은 자리에서 뭔가 계속 옥신각신하며 다투는 소리가 뒤에까지 들려왔다. 젊었을 적에는 어느 가정에서나 이런저런 일로 다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만사가 봄눈으로 녹아 서로의 고달팠던 인생을 용서하고 위로해 주는 금실부부(琴瑟夫婦)로 돌아가지 않던가.
나는 문득 옛날의 그 친구가 생각났다. 그와는 거의 한평생을 함께한 사이인데, 잘못 만난 부부의 악연으로 괴로워하다가 10여 년 전에 타계한, 과묵한 친구이다. 그는 조용한 자리에서 만나 차라도 한 잔 하는 때면 한숨을 내쉬며 이런 푸념을 하곤 했다.
“남남끼리 만나 한평생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괴롭고 슬픈 일이여. 인연에 호연(好緣)이란 말은 없지만, 악연(惡緣)이란 말은 있지 않은가. 그것도 내 어머니가 중매한 여자이고 보니 정말 희한한 인연이지.”

그 친구는 젊었을 적부터 여름 난방셔츠의 색깔은 변함없는 회색이어서 보다 못 한 내가 밝은 색깔을 권했더니 자기는 중들이 입는 승복(僧服) 색깔이 가장 마음에 든다며 내 말을 잘라버렸다. 그의 고독은 타고난 운명이던가. 일찍 떠난 친구를 생각하며 10여 년 전에 쓴 나의 졸작 <모두가 빈자리> 한 대문을 여기 옮긴다.

- 그러던 그가 하루는 시간을 내어 많은 말을 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아내와의 결별을 몇 번이고 결심을 했지만, 가엾은 딸아이가 자꾸만 눈에 밟혀 어찌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정의 끈이 이토록 모질고 질긴 것임을 미처 몰랐다는 것이다. 술을 잘 못 하는 그와 나는 맥주 한 병을 비우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략)
그런데 하루아침에는 일어나 보니 수놈이 새장 안 받침대에서 떨어져 바닥에 누워 있었다. 다시 수놈을 한 마리 사서 새장 안에 넣어 주었다. 처음에는 서로 경계를 하더니 곧 사이가 가까워졌다. 재혼으로 맞아들인 수놈은 제 알도 아닌데, 암컷과 번갈아가며 부지런히 품어 주기도 하고 새장 안에 떨어져 있는 풀잎을 물어다가 보금자리를 예쁘게 꾸미기도 하였다. 새들도 인연이 따로 있구나 싶었다. -

분당에서 출발하여 네 시간 가까이 달리니 순천터미널에 도착하자 여수 갈 사람들만 남고, 많은 승객이 차에서 내렸다. 그들 두 노인도 순천 손님인지 두툼한 보따리 짐이 두 개나 되었지만, 할머니 혼자서 이고 들고 하여 끙끙거리며 대합실 쪽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허리가 아파서 네 번이나 수술을 받았다는 깽깽이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짚은, 굽은 허리로 할머니의 뒤를 말없이 따랐다. 앞서 가던 할머니는 보퉁이를 인 무거운 머리로 허리 아픈 할아버지가 걱정되었던지 잠시 멈춰 뒤를 돌아다보고 서 있었다.
순천에서 여수로 가는 동안 나는 그 다투기만 하던 노부부의 인연이 오래도록 평안하기를 빌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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