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가 피곤하면 화랑에 들러 그림을 구경한다. 화랑의 주인장은 대뜸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 쪽으로 다가서면서 이 그림에 눈짓을 한다. 하지만 나는 화가의 이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누가 그렸건 상관하지 않고 그림만 마음에 들면 그만이다. 물론 그림솜씨가 좋기 때문에 유명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름을 그림보다 앞세우려는 화랑 주인장에게 괜한 거부감이 들곤 한다. 성의 없이 끼적거려 놓은 선과 색채에서 가끔 상업적인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연전에 인사동에서 조그만 족자의 동양화 한 폭을 헐값으로 샀다. 벽에 걸어놓은 지 1년이 지나도록 나는 아직 그 화백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이끼 낀 바위 틈바구니에 뿌리를 박아둔 채 옆으로 휘어져 뻗은 둥치 끝에 싸리나무처럼 자잘한 부챗살로 퍼진 가지 사이로 참새 서너 마리가 목을 움츠리고 있는 겨울철의 소박한 정경을 담은 그림이다. 내가 이 그림을 사게 된 첫째 이유는 서로의 몸을 의지하고 추위에 떨고 있는 참새 때문이요, 다음으로는 이 무명화가의 자상하고 성의어린 손끝이 보였기 때문이다.
요즘의 어느 집을 가보든지 자기 한두 점은 쉽게 볼 수 있다. 그것들이 놓인 자리는 대개의 경우 사방탁자이지만, 책상 위나 혹은 장롱 위에서도 더러 본다. 종류는 화병이나 접시 모양 혹은 술잔 모양 등 다양하며 한결같이 맵시 있고 윤이 나는, 값비싼 것들이다. 물어볼 것도 없지만, 예의상 물어보면 여부없는 고려자기나 이조자기이다. 그러니 값이야 물어서 무엇 하겠는가.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손수레에 그득히 실려 가고 있는 자기 더미를 보았다. 그 자기수레를 지나서 조금 가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되돌아가 먼지를 뿌옇게 둘러쓰고 있는 그것들을 뒤적거려 보았다. 이름 있는 골동품가게에서 볼 수 있는 것들과 다름없는 자기이다. 연조는 비록 이조, 고려까지는 거슬러 올라가진 못한다 할지라도 가느다랗게 뽑아 올린 목의 선이며, 날씬한 허리에 대어 탐스럽게 퍼져 내린 엉덩이의 선이며 생긴 모양은 조금도 손색이 없는 바로 그것이다. 나는 수레꾼의 눈치를 살펴가며 한참 뒤적거리다가 맨 밑바닥에 깔려 있는 볼품사나운 꽃병 하나를 끄집어냈다.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집 나간 아들을 찾아 오래도록 헤매다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어머니의 목멘 감격이었다고나 할까.
“이거 얼마죠?”
묻는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손수레꾼은 싱겁게 웃고 있었다.
“이건 팔지 않는 거요?”
다시 묻는 나의 말에
“그걸 어떻게 팔겠소. 버리기도 뭣해서 그냥 싣고 다니는 건데요 뭐.”
“그렇지만 내가 산다는데…
“꼭 그러시다면 5백 원만 주세요.”
연두색의 꽃병인데, 목이며 허리가 어쩌면 그렇게도 휘어지고 비뚤어졌는지. 실패작 중에서도 완전한 실패작이다. 나는 집에 와서 이것을 물로 씻고, 행주로 깨끗이 닦아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고 있다. 몸맵시 날렵한 다른 자기들과 함께 어울리지도 못하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그늘진 밑바닥에 깔린 그의 아픔을 나는 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아픔을 통해 나의 삶의 아픔을 배우고 있다.

며칠 전 김 형과 모처럼 만난 대폿집 술안주에 참새구이가 나왔다. 요즘은 참새가 아니라 이상한 산새나 굴뚝새들을 마구 잡아 판다고 하니까 김 형은 무슨 새가 됐건 ‘새’면 된다는 말에 많이 웃었다. 그런데 내 말은 참새가 아니면 맛이 없다는 뜻에서 한 말이 아니다. 바싹 마른 사람을 두고 ‘참새 앞정강이 같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힘세고 살이 많은 독수리나 까마귀가 더욱 좋지 않겠는가고.
오늘도 하늘은 맑고 푸르건만, 웬 겨울바람은 이다지도 차가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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