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고 꽃이 지고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촉촉이 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봄비 내리는 새벽에 잠에서 깨었습니다.

요즘처럼 싱숭생숭한 날에는 늘 이렇게 홑이불처럼 가벼운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깨어나곤 합니다. 그리고 아침이 올 때까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습니다.

아내는 곤히 새벽잠을 자고 있는데 곁에서 뒤척일 수도 없고 가만히 거실로 나왔습니다. 컴컴한 거실의 불을 켜고 습관처럼 커튼을 열었습니다. 그랬더니 창밖에 봄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내리는 봄비.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또닥 또닥 또닥 빗소리는 곱고, 비에 젖은 가로등은 혼자 외롭지 않으려는 그 모습이 처량합니다. 아! 이러한 새벽에는 이런저런 상념들이 많아집니다.

나이가 들수록 늘어나는 것이 있고 줄어드는 것이 있습니다. 늘어나는 것은 눈치이고 아부이고 몸무게입니다.

세상 경험이 많아지니 눈치가 늘고, 세상에 적응하자니 아부가 늘고, 그렇게 이것저것 늘다보니 몸무게도 덩달아 늘어납니다.

반대로 줄어드는 것도 있네요. 기억력이고, 새벽잠이고, 자존심입니다. 방금 놔둔 휴대폰도 찾지 못하고 헤매야 하고, 오늘처럼 새벽에 깨어 잠 못 드는 날도 많아지고, 잘났던 자존심도 나이가 드니 많이 줄었네요. 모두가 세월 탓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꼭 서글픈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이 든 지금은 젊었을 때처럼 빨리 달릴 수는 없고 젊었을 때처럼 순발력 있고 총명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앞만 보고 달려왔던 지금까지의 모습에서 이제는 뒤돌아보고 반성할 줄도 알게 되는 내 모습을 보고서, 이것도 나이 듦의 고마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누가 그랬지요. 나이를 그냥 주어지는 대로 먹지 말고 어떻게 나이를 먹을지 생각하면서 먹으라고.

50대가 되고 나니 모든 게 예전 같지는 않지만 젊은 시절보다 지금의 생활이 더 만족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왜냐면 이 나이가 되면 집착과 욕심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서있는 분야에서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욕심과 중요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욕심이 30대 후반부터 40대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50대인 지금은 그것보다는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일을 하고 싶고, 외부적인 기준보다는 내적인 기준에 더 치중하면서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일에 더 집중하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이를 잘 먹는다는 것은 잘 익은 포도주처럼 숙성되고 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숙성이 잘된다는 의미는 지금까지 나만을 위한 삶에서 남을 위해서도 이해와 관용을 베풀 줄 아는 그런 마음도 갖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사람이 숙성되지 못하니 침묵했어야 할 순간에 침묵하지 못한 적이 많았고, 너무 빨리 내 생각을 표현했던 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이 숙성되지 못하니 겸손하지 못하고 늘 가볍고 경솔했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렇게 저지른 행동으로 인해 힘들었던 적도 많았고요.

그랬는데 쉰 줄을 넘어서니 그러한 일들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 전보다 많이 줄어든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 같습니다. 나이 듦의 감사함이지요. 이제는 그러한 실수를 많이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슬부슬 봄비는 내리는데, 내가 살아온 길이며 또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까지 자잘한 생각들이 까치발로 종종거리며 다가오는 새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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