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웬일인지 약속이 하나도 없었다. 결혼식도 없었고, 모임도 없었고, 누가 어딜 가자는 얘기도 없었다. 얼마만인가? 이렇게 아무 계획도 없는 날이.

그러다가 ‘혹시 내가 뭔가 빼먹은 게 아니야?’하며 휴대전화의 일정표까지 확인해 보았지만 없었다. 앗싸. 고락산에 갈까? 하다가 그냥 소파에 누웠다. 오전인데도 조금 더웠다. 선풍기를 틀었다.

그렇게 소파에 누워서 사놓기만 하고 보지 않던 책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뜨니 따사로운 햇살이 내 얼굴에 내려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사치스러운 게으름.

한 때 나의 애창곡은 이문세님의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대 사랑하는 난 행복한 사람...’ 뭐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 늘 삶이 퍽퍽하다고 생각했기에 행복하고 싶어서 그 노래를 자주 불렀다.

내가 요즘 많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은 쫌, 평안하기는 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그 평안함이 조금 불편하다. 마치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지금까지 편하게 살아오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잔잔한 수면 위에 떠있는 나뭇잎처럼 언제 급물살을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 때문일까.

서울에 있을 때였다. 주머니에 돈이 떨어졌다. 책을 사볼 돈은커녕 당장 밥 먹을 돈이 없었다. 그때 내 옆에서 공부하던 친구가 있었다. 나만큼이나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친구. 그렇지만 공부는 해야만 했던 친구.

하루는 이 친구가 자면서 끙끙 앓았다. 그 소리에 놀라 그를 흔들어 깨웠다. “왜 그래?”하고. 그 친구는 허리 좀 밟아 달라고 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그 친구의 윗옷을 걷어 등짝을 보았다. 거기에는 파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나처럼 늘 돈이 궁했던 친구. 그는 공사판에 나가서 건설 일을 했다고 했다. 그 생활이 꽤 되었다고 했다. 그랬지. 그 때는 뼈빠지게 공부해도 늘 세 끼 밥을 걱정해야 할 때였다. 나보다 용감한 녀석.

그 다음 날 새벽에 나는 그 친구를 따라 나섰다. “너! 할 수 있어?”하는 친구의 불안한 시선이 내게 꽂혔다. “할 수 있어. 임마!” 그렇게 따라나간 곳은 영등포의 허름한 인력시장이었다. 영등포역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아직 어둠이 짙게 내려있는 새벽. 우리보다 일찍 나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뻑뻑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허름하고 두툼한 잠바를 입은 사람들. 잠시도 가만히 서있지 못하는 서성거림. 조금은 쌀쌀한 날씨. 겨울이 되기 전의 늦가을이었다.

조금 있으니 봉고차가 하나 둘씩 도착해서 한 차에 다섯 명씩 여섯 명씩 태우고 떠나갔다. 잠깐 인력사무소에 들어갔던 친구가 잽싸게 내 손을 잡고 눈짓을 했다. 그 친구의 눈짓 끝에는 회색빛 봉고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났다. 내가 간 곳이 어디쯤인지 나는 몰랐다. 서울 지리를 모르는 촌놈이었으니. 그렇게 도착한 곳은 신축중인 어느 건물의 건설 공사장이었다. 나중에 그곳이 양천구 신정동의 어디쯤이라 했다. 그곳에서 하루 종일 2층과 3층을 오가며 벽돌과 철근을 날랐다. 기술이 없으니 막노동을 하는 것이 우리 일이었다. 친구는 일을 하다가도 몇 번이나 내 눈치를 살폈다. 아마 ‘저 놈이 제대로 견딜 수 있겠나?’ 싶었을 게다.

노가다. 우리는 그 일을 그렇게 불렀다. 벽돌을 등에 가득 지고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오를 때면 두건을 쓰고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내 얼굴, 벌것게 상기된 내 얼굴이 유리창에 스쳐 지나갔다.

생소한 모습. 나는 일부러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내 스스로 불쌍해 보일 것 같아서. 친구는 계단을 오르내리다가 나와 스칠 때면 혼잣말처럼 이런 말을 했다.

“살살 해, 내일도 나와야 하니.”

꼭 동생을 데리고 노가다 일을 나온 형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하루 일을 마치니 일당을 주었다. 거금 3만원. 한 달 생활비가 10만원이었으니 내게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일을 마치고 몸을 씻는데 양쪽 어깨쭉지에 검붉은 피멍이 길다랗게 보였다. 짐통을 멘 멜빵 자리였다. 처음 해보는 노가다. 다리도 허리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아팠다. 그렇게 끙끙 앓으면서도 3일을 연달아 나갔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달 생활비를 위해서 3일은 버텨야 했다.

그렇게 3일을 버티고 나서 결국 퍼졌다. 며칠 동안 책은 커녕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석 달을 버티다가 포항제철 시험을 봤다. 더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들은 축하한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합격 통지서가 슬픔이었다. 통지서를 받고 그 친구에게 “나 내려간다.”고 말했다.

그때 그 친구에게서 느껴지는 서글픈 표정. 그날 우리는 소주 한 잔을 했다. “고생을 해도 같이 하는 놈이 있어서 좋았었는데 너만 가는 구나?” 하는 말에 그도 나도 잠시 눈물을 보였다.

그때 내 수중에 남은 돈아 있는 돈이 도합 6만 2천원. 그것을 모두 그 친구에게 털어주었다. “내 전 재산이다.”하고. 내가 그 친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돈 벌면 내가 조금 더 보내줄께 하고.

그 이후로 버릇 하나가 생겼다. 딱한 사람을 만나면 내 지갑에 있는 돈을 모두 다 줘버리는 버릇. 금액이 많을 때도 있고 적을 때도 있지만 개의치 않고 모두 줘버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다는 미안함과 함께. 그렇게 포항에 내려와서 지금처럼 딱 이랬다. 사치스런 게으름을 피우면서도 느껴지는 허전함.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제부터라도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아름다운 음악도 많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꽃이 피면 발을 구르며 환호하고, 꽃이 지면 후련하게 서러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이후 26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나는 꽃이 피면 발을 구르며 환호하지 못하고, 꽃이 지면 후련하게 서러워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 마음속에 짐이 있기 때문일까. 언제쯤 그리 살아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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