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여름 날씨 아니랄까봐 후덥지근한 며칠 뒤끝에는 느닷없는 소나기가 쏟아지니 미련을 남기며 어물거리던 늦봄이 꽁무니를 뺄 겨를조차 없이 내빼는 듯하다.

비 내리는 날 아침엔 약속이나 한 듯이 창밖을 내다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베란다 앞 작은 화단엔 작년 5월경에 심어 놓은 여린 장미가 몇 그루 있는데 올 6월 들어 붉고 노란 꽃잎들이 탐스럽기 그지없다.

빗방울이 거칠다 싶은 비로 시작하는 날 아침엔 그 녀석들의 밤새 안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장미의 매력이 가시라 했던가. 그 가시도 피해가는 굵직한 빗방울들 앞에선 장식물에 지나지 않았던지 눈앞에 떨구어진 꽃잎들을 하염없이 빗방울을 머금고 쳐다만 볼 수밖에... 또 피어날 새 식구를 기약하며. 약간의 아쉬움은 남는다. 아직 장마는 아니지만 미리 지줏대라도 해 줄걸 하고...

얼마 전 교체한 와이퍼가 불량인지 유리를 연신 긁어대는 거슬리는 와이퍼 마찰 소리에 오디오 음악도, 빗소리도, 소음으로 들리는 출근길이다.

비오는 날은 으레 오전에 병원이 조금 북적거리려니 하고 약간의 각오(?)를 하고 출근한다. 까닭은 우천에 작업을 못하는 야외 현장일을 하시는 분들이나 동네 텃밭 농사를 소일 삼아하시던 노인 분들이 미뤘던 치과 볼 일을 보러 오시기 때문이다.

첫 환자분도 할머니시다. “어떻게 오셨어요?” “ 이빨이 아파서 왔제!” “ 네. 어느 이가 안 좋으실까?...할머니” 말씀은 이렇다.

수년 전 신경치료를 받았던 이가, 비용이나 치료에 대한 두려움으로 연이은 치료를 차일피일 미루다, 부러져서 경로당 할머니 소개로 실력이 좋다는 무자격치과업자에게 이를 해 넣었는데, 아파서 그 쪽에 따졌더니 신경치료 한 이가 문제더라고 했더란다.

말씀이 두서가 없어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보니, 예상대로 신경치료를 했던 치아를 크라운으로 씌워주는 보철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미루다 보니 부러져 뿌리만 남게 됐고, 그 상태로 용하다는(?) 무자격자에게 보철치료를 받으니 부러진 치아 뿌리를 잇몸 아래에 남겨둔 채로 앞 뒤 이를 삭제하여 보철치료를 마무리 한 것이다.

말은 맞다. 내가 신경치료를 해 준 이가 문제이긴 하다. 여하튼 차분히 설명 드리고 그 뿌리를 제거하려면 먼저 해 넣은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설명드리니 할머닌 바로 울상이 되신다. “돈도 없고 해 넣은 지 반년도 안 되었는데” 하시며 근심어린 미간이 절로 좁혀 온다.

나 또한 잇몸 아래에 몇 년은 잠자코 있지 벌써 삐져나와 할머니를 힘들게 하나 하며 하릴없이 연민만 스민다. 할머니의 깊은 주름골에 반쯤 파묻힌 눈은 진료실 창밖의 흘러내리는 빗줄기에 고정된 지 벌써 오래다...

치과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끔 치료를 받기위해 동료의 신세를 질 때면 나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물며 일반인들은 어쩔까 하는 생각을 종종한다.

하지만 치과치료야말로 미룰수록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는 격이 되니,이럴땐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속담이 있어서 다행이다 싶다.
장미꽃이야 큰 문제만 없다면 빗줄기에 떨어진 꽃 한, 두 봉오리쯤이야 신기하게도 때만 맞다면, 어김없이 새 꽃봉오리가 나온다.

하지만 한 번 영구치열이 완성된 후에는 빠지거나 부러지면 새 순이 돋아나지 않는다. 우리 한국인들처럼 말린 오징어 다리를 앞니로 뜯거나, 꽃게요리를 도구도 없이 잘라 먹을 수 있는 민족은 또 없을 거라 생각된다.

그 혹사시킨 양 만큼 서양인들보다 정기적인 치과검진이 필요하며 제 때에 모든 치료를 반드시 치과를 찾아가 진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

저녁쯤 다행히 비가 그친다. 퇴근길엔 화원에 들러 제대로 된 지줏대 몇 개 챙겨야 할 성 싶다. 장마가 오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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