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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이웃 ‘한센인’] (2)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었다조국은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은 번창하지만 나의 한과 비통한 비밀을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자식에게도 말 못할 수치와 한을 안고 오늘까지 살아왔다.
마재일 기자  |  killout133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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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14  19: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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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인권변호단(단장 박영립 법무법인 화우 공익재단 이사장)은 지난 2004년부터 13년간 일본과 한국 정부를 상대로 진행한 한센인 피해 소송 과정과 결과를 모아 지난해 1월 <한센인권활동백서>를 발간했다. 백서 4권에는 한센인권변호단 활동 과정과 사진 자료 등이 담겼다.

백서에는 가족과 고향으로부터 버림받고 사회의 편견과 무지로 인한 차별과 냉대, 강제 단종·낙태·노역 등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외롭게 살아야 했던 소록도 한센인의 아픈 이야기도 기록됐다.

박영립 단장은 <한센인권활동백서> 발간사에서 “한센인들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무지와 무관심, 잘못된 편견 속에서 ‘천형’의 차별을 강요받아 왔다. 살아서는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고 죽어서는 예외 없이 시신 해부와 화장 등 인권유린을 당했으며, 기아와 의식주의 결핍 속에서 인간다운 처우를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한센인들에 대한 이러한 이유 없는 차별과 편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잊혔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본지는 소록도 한센인 피해자들의 증언을 일부 요약해 보도한다. -편집자주-

   
▲ 2차 소록도병원 확장공사. (사진=한센인권활동백서) 

◇ 늘 배가 고팠고 심한 강제 노역과 폭행은 너무나 큰 고통

함경북도 출신 이○○(1921년생, 남)은 스무 살 무렵 손발의 감각이 없어지며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작은 형도 같은 증상을 보였다. 1943년 3월 중순 경 집에 식구들이 없는 상황에서 일본 순사가 와서 자신과 작은 형을 강제로 연행해 기차에 태웠다.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 한마디 못하고 집을 떠나야 했다. 기차는 중간 중간에 같은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을 태웠는데 소록도로 간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새벽에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잠시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하는 너무나 고된 생활이었다. 휴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같이 지내는 10명의 한센인들의 식사와 청소 심부름을 하기에도 바빴고 잠시 시간이 나면 벽돌을 나르거나 가마니를 짰다. 힘든 일을 하면서도 식생활은 아주 형편없었다. 하루에 보리 두 홉, 쌀, 강냉이 등과 반찬으로는 소금뿐이었다. 늘 배가 너무 고파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치료약은 대풍자유 주사나 환약뿐이었다.

너무나 힘들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도망갈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실행하지 못했다. 같이 지내던 사람이 도망치다 잡혀 죽도록 두들겨 맞고 감금실로 갇혔다. 감금실은 이불도 없고 시멘트 바닥이어서 견디기 힘든 곳이었다. 감금실에 끌려가 죽지 않은 사람은 단종수술을 받아야 했다. 입소자가 사망하게 되면 반드시 해부실에서 해부된 후 화장됐다.

강제로 끌려와서 심한 강제 노역과 폭행 등으로 너무나 큰 고통을 받았다. 해방이 됐지만 38선이 생겨 고향에 가지 못하고 가족들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소록도의 생활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된 생활이었다. 작은 형은 당한 고통으로 소록도에서 사망했다. -2004년 7월 17일 진술-

   
▲ 가마니 짜기. (사진=한센인권활동백서) 

◇ 너무 힘들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뿐

함경남도 출신 임○○(1923년생, 남)은 어릴 때부터 나병을 앓았는데 1942년(당시 19세) 일본군이 강제로 열차에 태워 소록도에 수용했다. 사방이 바다인 소록도에 당시 3000여 명 정도의 나병 환자가 있었는데 무장한 일본군 500여 명이 밤낮으로 지켰다.

석축을 쌓고 공원을 조성하는 등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 평소 눈이 어두워 사물을 잘 분간하기 힘든 상황에서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 자살도 수차례 결심하기도 했다. 도저히 참지 못한 일부 환자들은 자살을 했다. 바다를 헤엄쳐 도망가다 빠져 죽는 사람도 비일비재했다.

강제 노동은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꼬박 12시간 이어졌다. 밥은 주로 옥수수, 밀로 쑨 죽을 줬다. 옷은 광목천으로 만들어 입었다. 잠은 시멘트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잤는데 제대로 씻지 못해 이(머릿니), 벼룩, 빈대가 득실거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춥고 배고프고 개·돼지만도 못한 고통스런 생활이었다. 너무 힘들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느 날 일본군이 모두 배를 타고 육지로 나갔다. 해방이었다. 이제 고향으로 갈 수 있겠구나 싶어 기뻤는데 정부가 격리 수용을 해 환자들을 돌봤다. 1980년 11월 19일 소록도에서 퇴원해 현재 ○○마을에서 생활하고 있다. -2006년 2월 16일 진술-

   
▲ 감금실. 한센인은 당시 소록도 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노역을 거부하거나 탈출을 시도한 한센인은 감금실에 끌려가 금식이나 체벌 등의 징벌을 받았다. (사진=마재일 기자) 

◇ 아버지, 주사 부작용으로 사망…어머니, 임신중절 후유증으로 실명

경상북도 출신 권○○(1931년생, 여)은 한센인 부모의 외동딸로 태어나 부모와 함께 유랑생활을 하다 7세 때 나병이 발생했다. 1939년 부모와 소록도에 들어갔다. 당시 임신 6개월이었던 어머니는 임신중절수술을 받았고 발가락 수술을 받은 아버지는 주사를 잘못 맞아 그날 밤 입에 거품을 물고 사지가 오그라든 채 사망했다. 임신중절 수술 후유증으로 실명한 어머니의 몫까지 일을 해야 했다.

9세 때 녹산국민학교에 들어갔는데 새벽 3시에 일어나 밥을 해 먹고 학교에 갔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산에 가서 나무도 하고 벽돌도 나르는 등 어른과 똑같이 일을 했다. 식사 배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파래, 톳, 굴을 따다 먹어야 했다. 투정을 부릴 때면 어머니는 내 밥에서 파래를 걷어다가 당신 밥그릇에 담고 당신 밥을 제 밥그릇에 담아 주곤 했다. 어머니와 나는 대풍자유 약물을 먹고 주사를 맞았는데 파래를 채취하기 위해 바닷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눈 위가 퉁퉁 부었으며 양쪽 다리와 엉덩이에는 대풍자유 주사를 잘못 맞아 곪은 상처를 짼 흉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아버지가 그렇게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도 가슴에 한이 되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기름보일러가 설치되자 “나도 따뜻한 방에 살아 보는구나”라고 하신 말씀도 가슴에 못이 된다. -2006년 12월 10일 진술-

   
▲ 경계선 감시소. (사진=한센인권활동백서) 

◇ 탈출하다 잡혀 감금에 구타, 단종수술

경상남도 출신 유○○(1926년생, 남)은 일제 강점기에 소록도는 고생 그 자체였다. 그중에서도 제일 힘들었던 것은 강제 노동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솔갱이(솔가지) 따서 관솔 기름을 짰으며 짚을 꼬아 가마니를 짜야 했다. 벽돌도 만드는 등 이른 아침부터 쉴 새 없이 일했다. 부상을 당해도 치료를 받거나 작업을 쉬지 못했다. 고된 노동에도 식생활은 형편없었다. 너무 배가 고파 시래기를 삶아 먹어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다. 영양실조로 사망한 입소자도 있었다.

일본인 직원과 그 밑에서 일하는 한국인 직원과의 차별과 폭력은 아주 심했다. 나환자라고 인간 대우를 전혀 받지 못했다. 일을 조금 늦게 하거나 직원의 뜻에 맞지 않으면 채찍과 막대로 죽도록 맞았다. 생활이 너무 힘들어 도망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도망가다 잡히면 죽도록 얻어맞았다. 나도 너무 힘들어 죽으려고 물가에도 몇 번 갔다. 헤엄을 잘 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잡히고 말았다. 감금실에 10일 정도 갇혀 심하게 맞았다. 맞아서 당시 입었던 흰옷이 빨갛게 물들었던 게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시멘트 바닥에 이불도 주지 않았다. 당시 감금실에 있을 때 단종수술을 받았다. 감금실에 끌려가 죽지 않은 사람은 다른 징벌로 단종수술을 받아야 했다. 해방 이후 2~3년이 지나 소록도에서 도망쳐 나왔다. 혼인해 아내와 함께 살고 있으며 자식은 없다. -2008년 1월 8일 진술-

   
▲ 일제가 수감자를 상대로 강제 정관수술을 자행한 도구 ‘단종대’. (사진=한센인권활동백서) 

◇ 마취도 안하고 낙태수술, 후유증으로 아기 낳아도 곧 죽어

충청남도 출신 이○○(1928년생, 여)은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14살 무렵 다리와 손가락에 감각이 없고 얼굴과 어깨 등에 물집이 생겼다. 시집을 가면 안 잡아간다고해서 15살에 시집을 갔다. 하지만 증세가 계속돼 결국 시댁에서 쫓겨났다.

한센병 환자였던 둘째 언니가 소록도에 있었다. 형부가 찾아와 아무도 모르게 일주일 넘게 걸어서 소록도로 갔다. 대풍주사를 잘못 맞은 오른쪽 다리에 고름이 생겨 결국 칼로 도려내야 했다. 배가 너무 고팠다. 보리쌀을 솥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쌀, 김치, 강냉이를 넣어서 죽인지 밥인지도 모르고 먹었다. 그것이라도 배부르게 먹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했다.

소록도에 들어간 지 5~6개월쯤 임신한지도 몰랐는데 방을 관리하는 사장(舍長)이 병원 여자부에 보고를 해서 강제로 데려가서 낙태를 시켰다. 낙태약(불그스름한 물약)을 자궁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마취를 시키지도 않았고 바로 낙태가 되지 않아 3~4일을 가입원실에서 고통 속에 신음 했다. 발가벗은 채로 악을 쓰고 고함을 질렀다. 결국 아이는 낙태됐다.

해방 후 결혼을 했는데 임신을 해도 그때의 고통 때문에 아기를 낳으면 죽곤 했다. 당시 낙태 이후로 산후병에 시달려 고생했고 지금도 힘들다. 일제 강점기 소록도에서 겪은 배고픔, 서러움, 아이를 생으로 낙태시킨 고통, 너무나 잊을 수 없다. -2007년 3월 17일 진술-

   
▲ 영아원 생활 모습. (사진=한센인권활동백서) 

◇ 탈출 하다 잡힌 아버지 시신 해부 ‘코 잘려’

경남 출신 조○○(1934년생, 남)은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부모님과 소록도에 들어갔다. 저녁 9시경 점호를 하는데, ‘이찌, 니, 산, 시...’로 인원을 확인하고 신사참배 때 “고고쿠 시미나리”로 시작하는 일본 국가를 매일 불렀다. 조금이라도 틀리면 매를 맞았다. 저녁에 가마니 짜기 작업을 도왔는데 할당량이 있어 어린 나이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새끼를 꼬아야 했다.

중앙공원의 주방 원장 동상을 지날 때마다 절을 하게 했다. 한 달에 한 번 모두 모여 동상 참배 행사를 했는데 맨 앞줄에 있던 나는 주방 원장 살해 사건을 목격했다. 7세 이하 아이들에게는 배급을 하지 않아 부모의 식량으로 나눠 먹어야 했다.

아버지는 소록도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해 결국 형무소에서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시신을 염하는 과정에서 보니 코가 잘려 없었다. 사람이 죽으면 해부를 하는데 관에 넣기 전에 가족에게 얼굴을 보여 준다. -2008년 3월 31일 진술-

   
▲ 오마도 간척사업. (사진=한센인권활동백서) 

◇ 동상 걸려 손가락 모두 절단

경남 출신 김○○(1936년생, 여)은 5세 무렵 다리에 상처가 생겨 잘 낫지 않았고 손가락이 오그라드는 증상이 나타났다. 점차 얼굴 코 부위가 내려앉기 시작해 숨쉬기가 힘들었다. 이런 증상이 나타나자 마을 사람들이 나를 피했고 집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었다.

1943년 8월경 소록도에 들어왔는데 읍내에서 순사가 와서 나를 데리고 갔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 곁을 떠나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정말 무서웠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었다. 울어도 소용없다는 생각에 이곳 생활에 조금씩 적응했다. 배가 늘 고팠던 기억이 생생하다.

밤에는 방에서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짰다. 낮에는 벽돌을 날랐다. 겨울 찬바람에 동상이 걸렸는데도 계속 일을 시켜 손가락 모두를 절단해야 했다. 시키는 대로 안하면 어린 저를 구둣발로 차고 때렸다. 소록도에 병 나으러 왔는데 오히려 병이 악화돼 지금은 손과 다리가 다 잘려나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게 됐다. -2010년 12월 13일 진술-

   
▲ 작업중인 한센인. (사진=소록도자료관) 

◇ 아버지 매 맞아 죽고, 어머니 욕창으로 몸에 구더기 득실 비참하게 생 마감

전남 출신 이○○(1942년생, 남)은 소록도에서 태어났다. 임신 사실을 숨겨오다 적발돼 병원 측이 낙태 수술을 하려고 했으나 간호사들이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에 운 좋게 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가 3세 무렵 소록도의 벽돌 공장에서 일했는데 일본 감독 사또에게 미움을 사서 심하게 매를 맞고 감금실에 감금된 채 비참하게 죽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비참하고 억울한 죽음에 충격을 받아 중병에 걸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를 안고 갖은 고생을 하다 마침내 눈을 실명했다. 앞을 못 본다며 천대 받고 영양실조까지 걸려 형언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 어머니는 오랜 병환으로 온몸에 욕창이 생겨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비참한 몸으로 어린 나를 놔둔 채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죽은 후에도 해부실에서 난도질당하고 화장터에서 친척 하나 없이 생을 마쳤다.

5~6세 무렵 고아가 된 나는 소록도에서 아버지와 의남매를 맺은 여동생과 함께 살게 됐다. 그런데 고모가 어느 날 갑자기 사망했다. 지난 2005년 소록도에 갔는데 고모가 자살했다는 말을 들었다.

치료 본관 옆에 있던 조끼방(식당 옆에 석탄으로 불 때는 곳)에 가서 누룽지도 얻어먹고 하던 것이 기억난다. 조끼방 앞에는 연구실이 있었는데 쥐나 토끼를 연구실에서 쓰고 버린 것을 사람들이 주워 가죽을 벗기고 삶아먹는 것을 자주 보았다.

소록도에서 고향도, 친척도 모른 채 어린 나이에 양친을 비참하게 보내고 그래도 모진 목숨 살아 보려고 몸부림치면서 ‘성’까지 바꾸면서 살았다. 부모를 원망한들 누가 나의 이 형편을 알아주겠나. 조국은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은 번창하지만 나의 한과 비통한 비밀을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자식에게도 말 못할 수치와 한을 안고 오늘까지 살아왔다. -2006년 11월 18일 진술-

   
▲ 기도하는 한센인. (사진=한센인권활동백서)

◇ 고향은 너무나도 가슴에 엉켜 있는 것이 많다

전남 출신 모○○(1932년생, 여)은 7~8살 무렵에 한센병이 걸렸다. 한센병 환자였던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큰아버지 댁에서 얻어먹고 다녔다.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사촌들과 학교 아이들이 문둥이 자식이라고 때리고 놀렸던 기억이 난다.

주로 중환자들 심부름을 했다. 소록도에 들어와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배고픔이었다. 14세 무렵 해방이 됐는데 소록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25세 무렵 경남의 정착촌에 가게 됐다. 30세 무렵에 한센인 부모를 둔 사람과 혼인했다. 남편은 건강했지만 단종했다. 1983년경 남편이 죽은 뒤 다시 소록도에 들어와 살고 있다. 자녀도 없고, 사촌들과도 왕래 하지 않는다. 고향에는 한 번 다녀온 이후 다시는 가지 않는다. 어렸을 적에 사촌들로부터 받은 수모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고향은 너무나도 가슴에 엉켜 있는 것이 많다. -2010년 3월 2일 진술-

   
▲ 단종수술과 시신해부가 이뤄진 검시실. 소록도에서 생을 마감한 한센인들의 시신은 이곳에서 해부됐다. (사진=마재일 기자)

일본·한국 정부에서 피해 보상·배상 판결 13년 걸려

일본 및 한국 정부에서 한센인 피해 보상과 배상 판결을 받아내는데 13년의 시간이 걸렸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첫 소송은 관련 법이 없다는 이유로 패소했다. 한센인권변호단은 고흥 소록도, 여수 도성농원, 안동 성좌원, 익산 금오농원, 나주 호혜원 등 전국에 흩어져 있는 한센인 정착촌을 돌며 설명회를 열고 한센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진술서와 증거 자료를 모았다. 한국과 일본, 대만 국민 50만명의 서명운동을 받는 등의 노력 끝에 지난해 2월까지 총 피해자 590명이 일본 정부에서 1인당 1억 원을 배상받았다.

광복 이후 한국 정부 역시 한센인들에게 단종과 낙태 수술 등을 강요했다. 변호인단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한센인 538명에 대해 1인당 3000만~4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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