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 주민들 4년째 ‘화형식‧삭발식’ 결사항전
택지개발, 시민 행복과 부합하는지 되물어야
‘주민 모르게’ 일차책임 여수시…결자해지해야

▲ 전남 여수시 만성리 평촌마을 주민들이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택지개발에 반대하는 삭발투쟁을 벌이고 있다. (사진=만흥지구 개발 비상대책위 제공)
▲ 전남 여수시 만성리 평촌마을 주민들이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택지개발에 반대하는 삭발투쟁을 벌이고 있다. (사진=만흥지구 개발 비상대책위 제공)


“80%가량 되는 70~80대 원주민들은 생활터전을 잃게 된다. 돌봐 줄 가족이 없는 노인만 20여 가구다. 치매를 앓고 있거나 암 투병을 하는 주민도 있다. 땅을 내어주고 손에 쥐는 보상금만으로는 살길이 막막하다. 이들의 주 수입원은 정부가 지원하는 노인수당과 생계보조금이 대부분이다. 자식이 있지만, 연락을 끊은 주민도 있다. 이들이 갈 곳은 정해져 있다. 요양원이다.” (김철수 만흥지구 개발 비상대책위원장)

평촌마을 주민 80여 명은 8일과 9일 세종시 정부종합청사 국토교통부 앞에서 집회를 열고 개발 계획 철회를 촉구하며 소복 집회와 삭발식을 벌였다. 삭발식에는 주민 30여 명이 동참했으며 집회 도중 주민 1명이 실신해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결사 항전을 외치며 머리띠를 두르고 피켓을 든 지 올해로 4년째. 언제, 어디서부터 엉클어지기 시작했을까.

여수시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2019년 5월 30일 ‘여수 만흥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 공급촉진지구 조성사업’을 위한 기본협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이때부터 주민들의 일상은 불안과 분노로 엉클어지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사업 발표 이후 민선 7기 권오봉 시장과 면담을 요구하며 시청 내 진입을 시도하다 공무원들과 충돌했다. LH와 국토교통부, 여수시장 문구가 적힌 허수아비에 불을 붙여 화형식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후 시와 주민들의 대화는 끊겼다.

강력 반발 속에 중촌마을은 제외됐으나 평촌마을은 현재 진행형이다. 11월 중 지구계획 승인 심의를 앞두고 주민들의 반발 수위가 높아지고 있고 지역 정치권 등이 개발을 반대하고 있지만, LH는 계속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 전남 여수시 만흥지구 택지개발에 반대하는 평촌마을 주민 중 1명이 집회 도중 실신해 구급차에 실려 가고 있다. (사진=만흥지구 개발 비상대책위 제공)
▲ 전남 여수시 만흥지구 택지개발에 반대하는 평촌마을 주민 중 1명이 집회 도중 실신해 구급차에 실려 가고 있다. (사진=만흥지구 개발 비상대책위 제공)


주민들은 주민도 모른 채 밀실에서 추진된 사업이 주민 동의 없이 밀어붙이기식으로 하고 있고 원주민에 대한 주거대책, 검은 모래 만성리 해수욕장 청사진 불투명, 기존 상인들 생계 대책 불확실, 보상 산정 기준이 개발 이익금이나 개발 기간 오른 시세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반대하고 있다. 주민들과 접점을 찾지 못하면 물리력 충돌은 물론 극단적인 상황까지, 향후 닥칠 일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민선 8기 정기명 시장은 후보 시절 주민 편에 서서 개발을 반대한다고 했지만, 당선 이후 분명한 입장표명을 하지 않고 있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반대 주민들의 이주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반대하겠다”고 밝혔으나 막상 사후 조처는 적극적이지 않다. 시 공무원들은 LH와 입장을 같이하며 사업 추진에 적극적이다. 주민들은 이제 정 시장이 이 사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고 있다.

물론 반대 의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만성리 해변 상가 일부 주민들은 LH의 개발 사업에 찬성한다. 지난 10여 년 동안 지지부진했던 만흥지구 개발 사업이 더는 지연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수시는 그동안 만흥지구를 개발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13년부터 만흥지구를 관광단지로 개발하려 했고 타당성 용역조사 등을 거쳐 전남도로부터 사업승인까지 받았던 사업은 2016년 12월 여수시가 민간투자자와 검은 모래 해변 배후부지 개발 사업 투자협약을 체결하며 본격화하는 듯했다. 그러나 민간사업자가 예치금을 미납, 협약이 해지되면서 무산됐다.

평촌마을 일대를 ‘직접 공영개발’ 하겠다고 의회의 예산승인을 받은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느닷없이 민간임대주택공급지구로 변경해 LH와 협약을 체결했다. 시의회는 시민과 의회를 무시한 졸속행정이라고 강력 비판했다.
 

▲ 2019년 10월 23일 LH와 여수시가 만흥지구에 추진 중인 공공지원 임대주택 조성사업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권오봉 시장과 면담을 요구하며 진입을 시도하다 공무원들과 충돌했다. 주민들은 LH와 국토교통부, 여수시장을 쓴 허수아비에 불을 붙여 화형식을 하려 하자 공무원들이 이를 저지하면서 아수라장이 됐다. (사진=뉴스탑전남 DB)
▲ 2019년 10월 23일 LH와 여수시가 만흥지구에 추진 중인 공공지원 임대주택 조성사업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권오봉 시장과 면담을 요구하며 진입을 시도하다 공무원들과 충돌했다. 주민들은 LH와 국토교통부, 여수시장을 쓴 허수아비에 불을 붙여 화형식을 하려 하자 공무원들이 이를 저지하면서 아수라장이 됐다. (사진=뉴스탑전남 DB)


주민들의 가장 크게 분노를 한 것은 LH와 여수시의 무성의한 태도다. LH나 여수시가 주민들의 의견을 한 번도 들어보지 않고 밀실에서 추진해놓고 주민들 요구는 사실상 묵살한다는 것이다.

특히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 신뢰를 저버린 여수시는 주민들이 시청 앞에서 화형식 등 집회를 하며 극렬하게 저항할 때 공무원들을 동원해 막았다. 김철수 위원장은 “여수시가 중재 역할보다는 찬·반 주민들 간 이간질했다. 주민들의 여수시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있다”고 말했다. 시는 어느 날부터는 주민과 LH·국토부 간 문제로 직접 개입이 어렵다며 거리를 두는 태도를 취해오고 있다.

LH는 원래 그런다하더라도 여수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여수시가 반대 주민들의 목소리에 진정성 있게 귀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시장이 주민들과 대화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어느 공무원이 나서서 소통하려 하겠는가마는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태는 공무원에 대한 부정적인 평판을 심화시킨 선례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이 사업이 정녕 필요하다면 고압적인 태도로 주민들에게 생각을 바꾸라고 할 것이 아니라 여수시가 먼저 자세를 바꿔 설득하고 또 설득에 나섰어야 했다. 여수시는 주민 편이 아니었다. 찬성하는 주민도 있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진정 누굴 위한 택지개발인지를 되물었어야 했다. 서로가 차분하게 대화하고 대책을 고민했다면 LH가 저렇게 막무가내로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 전남 여수시 만성리 평촌마을 주민들이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택지개발에 반대하는 삭발투쟁을 벌이고 있다. (사진=만흥지구 개발 비상대책위 제공)
▲ 전남 여수시 만성리 평촌마을 주민들이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택지개발에 반대하는 삭발투쟁을 벌이고 있다. (사진=만흥지구 개발 비상대책위 제공)

 

주민이 표출하는 불만·불편을 귀담아듣고 이를 세밀하게 다듬어 정책에 반영하는 행정이 그다지도 어려운 일일까. 어떤 사안을 어떻게 처리했느냐에 따라 행정, 정확히 말하면 시장에 대한 평판이 팍팍 갈리는 시대다. 공무원이 처리하는 낱낱의 일에 관통하는 하나의 원칙은 시민의 삶의 질을 한 가지라도 더 높이려는 노력이어야 한다. 갈 곳 없는 원주민 쫓아내고 무주택 서민, 청년, 신혼부부 등 주거 지원 계층 시민의 주거안정을 도모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 설사 그 대의가 맞다 할지라도 전제돼야 할 것은 주민들의 동의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명백히 여수시와 LH에 책임이 있다. 대대로 일궈온 생존의 터전을 잃게 될 주민들의 반발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만흥지구 개발이 수차례 무산된 경험을 가진 여수시의 심정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누구보다 원주민 대다수가 반대하고 있다.

만성리 개발 방식을 두고 수년째 이어지고 있는 지역 주민들의 상반된 외침에 지역 사회가 더 늦기 전에 함께 고민하고 응답해야 할 시점이다. 찬반이 나뉘면서 갈등의 골은 깊어졌지만, 정작 행정과 정치는 수년째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주민들만 외로운 싸움을 벌이며 고립되는 양상이다. 여수시가 가장 먼저 명확한 입장을 내놓고 정리해 나가야 한다.
 

▲ 지난 10월 27일 국토부, LH의 현장 실사에서 항의하는 만흥지구 개발사업 반대 주민들. (사진=마재일 기자)
▲ 지난 10월 27일 국토부, LH의 현장 실사에서 항의하는 만흥지구 개발사업 반대 주민들. (사진=마재일 기자)

 

지난달 25일 주민들 집회에서도 여수시는 청사 뒷문을 걸어 잠갔다. 일부 공무원들은 출입문을 지켰다. 충돌은 없었지만, 도대체 왜 이런 상황까지 왔으며,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정기명 시장은 만흥지구 택지개발 사업 취지가 현재 거주 주민들 대다수가 원하고 궁극의 목적인 시민의 행복과 부합하는지 다시 한 번 물어야 한다. 접점을 모색하고 해결 방안을 찾아내는 일은 정치인이 할 일이다. 주민들이 답을 내놔야 하는가. 분열된 마을 공동체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따지고 보면 주민들이 무슨 잘못이 있는가. 멀쩡하게 살고 있는데 느닷없이 개발한다고 발표한 당사자는 여수시 아닌가. 결자해지하라.

“많이 지쳐 있다. 어느 누구하나 대화를 하거나 찾아오는 정치인, 시 관계자 하나 없이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포기하거나 죽거나. (중략) 다음날 단체삭발을 강행한다. 참으로 눈물이 나려고 한다. 대다수 주민이 80이 넘었는데 아무 이유 없이 그저 내 집에서 지금처럼 소박한 행복을 바라며 여생을 살기 위해서다. 보상을 바라거나 또는 그 무엇 하나 바람이 없다는 것이 더 슬프게 한다.” (김철수 만흥지구 개발 비상대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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