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스튜디오’ 운영하며 활동
그림책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볼 수
있는 책…자녀와 부모가 교감·소통
여순사건·섬·일상 이야기 전하고파

그림책을 일반 서적보다 두께가 얇고 내용이 짧아 아이들을 위한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림책은 숨은 의미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고 함축된 이야기와 그림으로 강렬한 메시지를 담는다. 아이와 어른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주기도 하고 아이와 부모가 함께 읽으며 교감할 수 있다.

우리나라 그림책 작가들이 세계 출판계에서 인정받는 사례가 늘면서 그림책 저변이 확산하고 있다. 한국인 최초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상을 받은 백희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받은 이수지 작가 등이 그림책에 관한 관심을 폭발시켰다. 이들 상은 아동문학의 노벨상이라 불린다.

그동안 아동문학의 하위장르 정도로 인식되던 그림책이 이제는 연령대를 뛰어넘어 예술, 교육, 심리치료, 도시의 기억 담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치유와 기록의 방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아이에서 100세 어른까지 볼 수 있는 책이라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그림책 작가는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전달한다. 전남 여수에서 ‘도토리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그림책 작가로 활동하는 최서영(32) 씨를 지난달 29일 만났다.

최 씨는 여순사건과 섬, 일상의 소소한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그림책을 통해 여수의 과거를 기억하고 시민의 삶을 기록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 그림책 작가 최서영. (사진=마재일 기자)
▲ 그림책 작가 최서영. (사진=마재일 기자)

자신을 소개한다면.

대학에서 문예창작학과 아동문학‧평론을 전공했다. 초중고를 광주에서,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 2018년 친정 부모님이 계신 여수로 왔다.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지난 11월 ‘도토리 스튜디오’를 오픈하고 글쓰기 & 미술통합 클래스와 그림책 작가 반을 운영하고 있다.

그림책 작가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있나.

처음부터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학 때 브라질, 미국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통해 경험을 쌓았고 자소서, 취업 컨설팅을 하면서 자연스레 글을 쓰게 됐다. 공모전에 곧잘 당선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 모 방송국에서 조연출(인턴)을 했는데 그곳에서 내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을 맞았다. 세월호 참사였다. 자식 잃은 부모들의 눈빛과 유민 아빠, 문재인 대통령(당시 후보)이 단식 투쟁을 하는 모습을 봤다. 난생처음 내 삶이 송두리째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귀가 먹먹해지고 답답해졌다. 더는 회사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극복이 잘 안 됐다. 혼란 그 자체였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휴식기를 가졌다. 어느 날 아이가 경련(열성)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처음 겪는 일이라 너무 무서웠다. 세월호 때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눈빛이 떠올랐다. 세월호 트라우마가 남아 있었다.
 

▲ 여수시 화정면의 섬 ‘조발도’ 이야기를 그림책 '하얀구슬'에 담았다. (사진=최서영 작가)
▲ 여수시 화정면의 섬 ‘조발도’ 이야기를 그림책 '하얀구슬'에 담았다. (사진=최서영 작가)

그림책 큐레이팅 자격증반을 운영하는 여수 환경도서관에 우연히 들렀다가 <나는 죽음이에요>(엘리자베스 헬란 라슨 글/마린 슈나이더 그림)라는 그림책을 만났다. 죽음은 무섭고 두렵지만, 삶과 죽음은 하나이고 절대 죽지 않는 것은 사랑이라는 메시지가 당시 너무 와 닿았다.

그동안 그림책을 유아적이고 유치한 문학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표현할 수 있구나, 어른한테도 감동을 줄 수 있구나’라는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작가가 되겠다고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여수시와 전남창조경제혁신센터, 전남문화재단 등에서 하는 청년 지원 정책이나 사업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느 날 여수YMCA에서 제 인스타그램을 보고 연락이 왔다. 지방에서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썼는데 제법 인기가 많았다. 여수시 화정면의 섬 ‘조발도’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제작할 수 있느냐는 제안이었다. 처음엔 거절했다. 육아에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고 제작 시간도 촉박했다. 결국, 수락하고 수차례 섬 답사와 주민들을 만나는 등 열심히 했다. 지금 그림책을 다시 보면 부끄럽기도 하지만 <하얀구슬>은 제 이름이 새겨진 첫 그림책이다.

더 감동이었던 것은 그림책 출간 후 조발도 주민들이 잔치를 열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림책 작가의 길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이때였다. 내 인생의 두 번째 전환점이다.
 

▲ 여수시 화정면의 섬 ‘조발도’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하얀구슬'을 펴낸 후 주민들이 잔치를 열어주셨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사진=최서영 작가)
▲ 여수시 화정면의 섬 ‘조발도’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하얀구슬'을 펴낸 후 주민들이 잔치를 열어주셨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사진=최서영 작가)

여수에서그림책 작가로 활동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일단 재료를 구매하는 것부터 힘들다. 그림책을 만드는 일련의 프로세스가 취약하다. 아무래도 전시회나 수요 등 그림책 시장이 수도권에 형성될 수밖에 없다.

또 아쉬운 것은 신진 작가들이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나 기회가 부족하다. 여수시가 문화도시 공모사업에 4번이나 탈락했다는 기사를 봤다. 여수시민의 문화생활 수준은 서울시민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올라가고 있다. 문화 행사는 많이 열리는데 ‘문화’는 형성이 안 된 것 같다. 커뮤니티까지 이어지지 않으니 문화로 정착되지 못한다.

여수가 인구소멸위험 지역으로 분류되던데 여전히 전남에서는 가장 많은 아이가 살고 있다. 아이를 키우는 30·40대 정책이 정말 중요하다. 이들을 타겟팅한 참신하고 다양한 문화가 있어야 한다.

그림책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해 준 좋은 사람들과 기회들이 서울에 살았다면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이 서울 사람인데 사실 여수에서 살 거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 했다. 아이 낳고 돌 지나면, 어린이집 갈 때쯤 다시 서울로 가려고 했다. 줄곧 광주와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여수로 내려오니 답답하기도 했다. 아주 어렸을 때 할아버지 집에 잠깐 머문 것 외에는 여수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런데 발길이 안 떨어지더라. 여수에서 살기로 마음을 굳혔다.

아들 친구 엄마들이 저에게는 큰 힘이 된다. 언니가 없는 데다 그나마 있던 친구들은 교육 문제 등으로 여수를 떠났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데도 친동생처럼 잘 챙겨주신다. 정서적으로 많은 위로를 받고 의지가 된다. 여수에서는 그림책 작가가 생소할 수 있지만, 묵묵히 최선을 다하다 보면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믿는다.
 

▲ 최서영 그림책 작가와의 만남. (사진=최서영 작가)
▲ 최서영 그림책 작가와의 만남. (사진=최서영 작가)

아이와 부모가 함께 그림책을 읽는 방법이 있다면.

아이가 똑같은 책을 계속 읽어달라고 하는 것은 엄마‧아빠하고 이 책을 읽었을 때 행복했던 기억 때문이다. 유아는 비언어적인 요소가 굉장히 발달하는데 표현을 못 할 뿐 부모의 눈빛, 표정, 청각 등을 기억한다. 책을 읽을 때 ‘엄마 눈이 커졌지, 이때 사랑받는 기분이었지’라고 느낀다. 유독 한 장면만 보는 아이들의 경우는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책을 통해서 부모와 사랑을 교감하는 것이다.

그림책을 아이와 재미있게 읽으려면 우리에게 익숙한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와 같은 옛날이야기를 권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을 필요는 없다. 매일 5분도 좋고 15분 정도를 추천한다.

시각은 노력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아빠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건 아이에게 큰 자산이다. 사람이 죽기 전에도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있는 게 청각이라고 한다. 책 읽기는 부모가 자신을, 가족이 서로 사랑한다는 암묵적인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는 아이들이 커가면서 큰 자신감으로 작용한다.

요즘 아이들은 유튜브, TV 등 영상 노출이 잦다 보니 아무래도 책을 가까이하지 않는 경향이 커진다. 그림책의 장점 중 하나는 아날로그라는 것이다. 눈으로, 손으로, 냄새로, 책장 넘기는 소리로 보며 경험한다. 아날로그는 인간이라면 필요한 활동이다.
 

▲ 그림책 작가 최서영. (사진=마재일 기자)
▲ 그림책 작가 최서영. (사진=마재일 기자)

향후 출간 그림책이나 목표가 있다면.

채소꽃에 관한 그림책을 작업하고 있다. 내년(2023년) 3월경 서울에서 그림책상상학교 졸업 전시가 있는데 채택이 돼야 한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판화로 작업하고 있다. 해야 할 일이 많다. 올해는 내게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여순사건을 주제로 그림책을 제작하고 싶다. 최근 국민보도연맹사건 희생자 아들인 김양기 씨의 영상기록을 봤다. 본인이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여느 어르신처럼 조용하고 자상해 보였다. 억울하게 가족을 잃고 고문을 당해 삶이 송두리째 망가졌는데도 얼굴에 드러나는 것은 삶을 부정하거나 불행한 모습이 아니었다. 우리는 희생자는 불행한 삶을 살 거라고 속단하기도 한다. 진짜 최고의 복수는 그렇게 살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희생자가 이긴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김양기 어르신은 유독 승리자처럼 보였다.
 

▲ 그림책을 제작하고 있는 최서영 작가. (사진=최서영 작가)
▲ 그림책을 제작하고 있는 최서영 작가. (사진=최서영 작가)

국가 폭력에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껴안고 살아가는 어르신의 이야기를 아이부터 어른까지 단숨에 읽을 수 있는 그림책으로 만들고 싶다.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여순사건 유족 대부분이 고령일 텐데 영상, 문학, 음악, 미술 등의 작품으로 다양하게 기록돼야 한다. 수십 년간 상처와 아픔을 견디며 살아온 그분들의 삶을 미약하나마 공유하고 치유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여순사건뿐만 아니라 기회가 된다면 여수라는 도시와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록하는 작업도 해보고 싶다. 개발 속도가 빠른 우리나라는 무언가가 훼손되고 없어지면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곤 한다. 여수도 예외는 아니다. 여수시민도 직접 이야기를 짜고 그림을 그려서 얼마든지 그림책으로 출간할 수 있다. 작가와 지역이 함께 커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마재일 기자 killout133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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