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몸에 기력이 빠져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꾸벅꾸벅 졸게 되니 잠자리에 들었다 하면 순식간에 녹초가 되어 깊은 잠의 바닥으로 침몰해버릴 것 같은데, 실은 그와는 반대이니 의학에 문외한인 나는 어떤 신체적 기능의 작용 탓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옛날 옛적에 가끔씩 우리 집에 다녀가신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그렇거니와 이를 뒷받침해 주는 문서의 근거로는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노래한 정지용의 시이다.

이 시의 주제는 고향 그리움에 대한 ‘향수’임에 틀림없지만, 나이가 목에 찬 나는 요즘 그 시를 다시 읽어 보면, 밤 깊도록 잠 못 들어 뒤척이던 어르신들의 불면증이 안쓰러워 그 시절에의 향수이기보다 연민의 정이 앞서 마음이 아프다.

아버지 어머니의 성격이나 체질의 장점도 많은데, 다 그만두고 나는 어머니의 통잠을 그대로 물려받아 언제 어디서나 앉았다 하면 봄날의 고양이가 되어 한가하게 존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가까운 중학 동창친구 여섯 명이 부부동반으로 모여 만든 ‘6인회’란 모임이 있었는데, 가끔씩 산장이나 해변으로 계절여행을 떠나면 낮에는 사이좋게 잘 놀다가도 잠자리에 들 때면 언제나 문제가 생긴다. 요즘에도 친목 모임이나 문학행사 모임에서도 잠자리가 바뀌면 쉽게 잠들지 못해 들락날락하며 괜한 술로 잠을 대신한다는 사람들을 더러 본다. 우리 모임에서도 그런 점을 고려해서 총무는 코골이들끼리 같은 방으로 몰아넣기도 하지만, 날이 샌 아침이면 제마다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잠 못 잤다는 성토다. 나는 집에서나 외지에서나 잠자리에 누웠다 하면, 숨소리도 없이 조용히 저승으로 사라져버리는 체질이어서 그것을 알고 있는 친구들은 방 배정을 할 때면 은근히 나를 유혹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으쓱해지면서 매년 한 번씩 찾아오는 ‘어버이날’과는 상관없이 어머니의 그 통잠 대물림에 감사한다.

어머니의 소문난 그 장기는 특히 봄, 여름철의 상추쌈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봄이 되면 무더기로 그물에 걸려 올라와 선창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멸치를 남도지방의 사투리로는 이를 ‘고노리’라고 하는데, 냄비에 자작하게 지진 이 ‘고노리’의 온마리를 송두리째 집어 올려 상추에 싸서 먹는 맛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다음에 쏟아져 내리는 졸음의 위력은 상추쌈의 맛을 훨씬 능가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심해로 침잠하는 어머니의 통잠은 날씨에 관계없이 사계절을 일관한다. 이는 항간에 떠도는 상추쌈의 속설에 따른 잠의 효력을 말한 것일 뿐 의학적 근거는 알 바 아니다. 아버지를 이야기한 글에서 곁들인 어머니의 잠 이야기가 생각나서 기왕 벌인춤이니 오래 전에 쓴 글 <쌍분(雙墳)>에서 한 대문을 여기 옮겨 적는다.

어느 날 초저녁부터 불을 끈 아버지 방에서는 밤늦도록 무엇인가 도란도란 속삭이는 소리가 바로 옆에 붙은 내 방에까지 들려오더니 갑자기 뜻하지 않은 고성이 밤의 적막을 깨고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다음 날 아침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인즉 포복절도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낮에 먹은 상추쌈으로 인한 졸음 때문에 초저녁부터 녹초가 되어 잠들어 있는 어머니에게 밤이 깊도록 들려 준 아버지의 인생론이 아무런 반응 없이 꺼져버린 허탈감에서 터져 나온 고함소리였다는 것이다.

나는 요즘 밤낮없이 하찮은 글을 쓴다고 컴퓨터 앞에 쪼그려 앉아 있어서인지 몸의 기력이 빠지고, 빈혈이 생겨 어지러우면서 눈이 침침하다. 눈에 눈물이 괴고, 마비된 한쪽의 눈꺼풀 아래위가 자꾸 마주 붙으면서 눈이 침침해지는 증세는 작년 겨울의 ‘구안와사’ 후유증인 것 같아 안과에 갔더니 누선(淚腺)이 막혀 그런 것이라며 두세 차례나 수술을 해서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세상살이가 하도 팍팍하고 용돈이 궁해서인지 흐르는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른다. 나의 ‘와사’를 고쳐 준 한의원에 다시 찾아갔더니 이는 안과 소관이니 모르기는 하지만, 과로에서 오는 불면 대문일 수도 있다면서 일곱 시간 정도의 충분한 수면을 권했다. 나는 순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도 나는 잠이 많아 한의원에서 말하는 일곱 시간을 넘어 여덟 시간을 자고 있으니 오히려 이것이 병이 아닌가 싶어서 잠을 덜 자게 하는 ‘벌침’을 한 대 맞을까 하다가 그냥 나왔다.

나이가 많은 내 친구들을 만나 점심이나 하는 자리에 앉으면, 모두들 잠이 안 와 괴롭다는, 한결같은 푸념이다. 이는 내 집사람도 마찬가지여서 괜한 마태복음만 거듭 되풀이해 읽으며 밤을 새운다니 주변 사람들의 이런 고생담을 들을 때마다 나는 어머니의 그 후한 잠 물림에 감사한다.

거실에서 이 한겨울의 추위에 떨고 있다가도 일찍부터 코드를 꽂아 놓은 내 방의 따끈한 옥돌매트를 생각하면, 금방 잠이 고기 떼처럼 몰려온다. 이불속으로 들어가면서 곧장 잠에 빠져들면, 요즘에는 무슨 까닭인지 앞서 저승으로 떠난 중학 동기 친구들이 마중을 나와 옛날이야기 하며 재미있게 놀다 돌아온다. 포근한 숙면 덕분인지 새삼 힘이 솟아 오늘도 나는 쓰다 만 수필 원고를 찾아 고달픈 나의 인생을 다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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