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음악 시간만 해도 그랬다. 여름 방학 전까지만 해도 가사와 계명 외우기로 시작하여, 점사팔사사 하며 음표까지 통째로 외워야 했다. 아무리 악보를 머리에 집어넣으라고 말씀하셔도, 머리를 악보에 처박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우리가 그냥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전학을 온 뒤 처음 만난 도시 학교는 무척 살벌했다. 외우고 맞는 게 일상이었다. 과목마다 교과서를 한 권 더 사서 중요한 낱말을 새까맣게 칠해 가며 달달 외웠다. 그러다 맞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짓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미술 시간에 더 이상 색상환표나 외우고 있지 않아도 되었다.

그 해 여름, 중학교 입시가 철폐된 것이다. 서울은 당장 시행된다고 하고, 내가 살던 도시는 고맙게도 우리부터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시험 없이 중학교에 간다는 말은 그대로 복음이었다. 철들고 나서 오랫동안 세상과 불화하였지만, 그때 누린 그 짧은 자유는 나머지 모든 불만을 덮고도 남았다.

그런데 사건이 터졌다. (그래, 그건 사건이었다.) 겨울 방학을 얼마 남겨 두고 있지 않을 때다. 교실에 오신 선생님은 칠판 가득 무엇을 적으셨다. 그러고서 공책에 베끼라고 하셨다. 한 글자라도 잘못 베끼면 한 글자에 한 대라는 말을 듣고, 침을 발라 가며 우리는 한 자 한 자 공책에 옮겨 적었다.

물론 잘못 베낀 놈들은, 혼났다. 글자 수가 393자였으니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우리 반만이 그런 게 아니라, 5학년 전체가 다 그랬다. 그러고 났더니 헉! 그 긴 글을 다음날까지 외워 오라는 것이다. 외우면 청소 안 하고 집에 간다는 말에는 솔깃했지만, 못 외우면 맞는다는 말에는 오금이 저렸다.

국민교육헌장과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그래도 나는 괜찮았다. 다른 재주는 젬병이었지만 외우는 것은 그나마 좀 되는 편이라, 며칠 버벅대다가 ‘하교조’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몇몇은 말이 아니었다. 맞고 또 맞았다. 교장 선생님이 돌아다니며 직접 외우기를 점검하는지라, 녀석들에게는 죽을 맛이었다.

험한 풍랑이 누그러지고 잔 파도 몇 개만 칠 무렵, 한결 느긋해진 틈을 타서 한 아이가 물었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한다? 선생님, 이게 뭔 말이래요? 그러자 선생님이 대꾸하셨다. 그런 건 시험에 안 나온다. 외우기만 하면 돼. 앞으로 그런 쓸데없는 질문, 하지 않도록!

사실 그랬다. 왜 우리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는지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외우라고만 했다. 시험에도 그렇게만 나왔다. 투덜거리는 녀석도 있었지만, 나는 견딜 만했다. 국산사자음미실 일곱 과목을 다 외우는 것보다 그깟 글 하나 외우는 것쯤이야 무슨 대수였겠는가.

어릴 때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
울면 된다. 그러면 누군가 달려와 일으켜 준다.
그런데 도시로 간 소년에게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오래 그 자리에 넘어져 울고 있는 소년을
이제라도 업고 돌아오고 싶다.
- 이제라도 업고 돌아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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