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성 여수고등학교 교사

새벽이면 눈을 뜨는 게 싫었다. 물 위에 떠 있는 섬처럼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 외로웠다. 아니, 괴로웠다. 하지만 일어나 찬물로 세수를 하고, 석유곤로에 불을 붙여야 했다. 밥알은 껄끄러웠고, 시디신 김치도 침샘을 자극하지 못했다. 주섬주섬 책 몇 권을 가방에 집어넣고, 터벅터벅 집을 나서야 했다.

그렇게 몇 달. 누구에게도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한복을 입은 어떤 여자를 작은어머니라고 부르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서, 고향조차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었다. 어머니를 보면 눈물만 솟는 곳. 모든 걸 들부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에 몸을 떨 뿐이었다.

그때 나를 달래 준 건 만화에 무협지였다. 학교만 끝나면 만화방으로 달려갔다. 마지막에는 보내 준 쌀까지 돈으로 바꿔, 탐닉할 정도였다. 그러다 밤늦게 방에 들어와 더듬더듬 전구를 찾아 스위치를 켰다. 아, 싸늘하게 부서지던 백열전구의 불빛. 그 빛살과 함께 방바닥에 산산조각 부서지고 싶었다.

사람은 얼마나 굶으면 숨이 멎을까. 그때 그런 생각을 처음 했다. 그날도, 아침도 거르고 점심도 걸렀다. 담임선생님 수업이니까 공업 시간이었을 것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데 온몸에 비적비적 진땀이 났다. 모든 것이 가물거렸다. 흐릿해졌다. 이게 끝일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정신을 차린 나를 데리고, 선생님은 자취방을 가자셨다. 부엌 찬장을 열어 보시고 방구석에 있는 쌀 포대를 보시더니, 말없이 나를 이끄셨다. 택시를 타고 남도극장 근처에서 내리셨다. 구불구불한 뒷골목으로 나를 이끄셨다. 내내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그러고 어느 집 앞에서 대문을 두드리셨다.

한복 차림에 앞치마를 두른 분이 우리를 맞으셨다. 사모님이셨다. 사실, 선생님은 그해 봄 가정을 꾸리셨다. 그때 선생님의 결혼 소식에 악동들, 얼마나 환호했던가. 손뼉을 치며 난리가 아니었다. 1주일 동안 담임이 학교를 비운다는 뉴스에 혹한 것이다. 무서운 담임이 없는 학급은 그대로 해방구였다.

사모님께서는 나를 큰방으로 안내하셨다. 선생님과 단 둘이 있는 방 공기는 매우 어색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으셨다. 이윽고, 상이 차려져 나왔다. 숟가락과 젓가락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배추김치와 무김치가 놓여 있었다. 아, 그런데 상 한가운데, 마늘을 듬뿍 넣은 닭백숙이 놓여 있었다.
사모님께서는 닭고기를 잘게 찢어 닭죽에 얹어 주셨다. 물끄러
미 바라보면, 어서 더 드세요 하며 미소를 지으셨다. 선생님께서도 닭죽 한 그릇을 다 비우셨다. 그러고 얼마 뒤 대문을 나서는 나에게, 보자기에 싼 무언가를 건네주셨다. 마른반찬과 함께 한 되쯤 되어 보이는 쌀 봉지가 거기 들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소년의 죽음은 유예되었다.
나이 들어
소년이 선생이 되어
자기 같은 놈을 볼 때마다
소년은 그때 그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 그때 그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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