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포마을 ‘망산 준령의 끝이 마을이 닿았다 해 망끄미 마을이라 불러’
심포마을 ‘금오도 남서편 포구로 포구가 깊다해 ’깊은 개‘라 불러’
안도마을 ‘섬의 형태가 기러기 같아 기러기 안(雁)자를 써 안호, 1910년 안도로 개칭’

전남 여수시는 3여통합 이후 26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지역민의 삶의 터전과 흔적, 변화에 따른 도시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수의 과거와 현재의 자취를 따라 미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여수시문화원은 지난 2021년 1월 ‘여수시 마을유래지’를 발간했다. 이를 토대로 27개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조선시대 여수 남면 금오도를 황장봉산으로 지정하고 임금의 관과 판옥선을 만들 소나무를 관리했다. (사진=한국섬진흥원)
▲조선시대 여수 남면 금오도를 황장봉산으로 지정하고 임금의 관과 판옥선을 만들 소나무를 관리했다. (사진=한국섬진흥원)

㉔남면

남면은 여수시 남쪽 해역에 있는 금오도 안도 연도 등 사람이 사는 11개의 섬과 27개의 무인도로 구성됐다. 면적 42.340㎢, 해안선 185.9㎞에 이른 금오도는 남면에서 가장 큰 섬으로 금오도를 중심으로 섬들이 연결된 것처럼 보여 ‘금오열도’라 부른다. 남면에 있는 섬 가운데 안도와 금오도의 심장리를 잇는 안도대교는 2010년 개통됐다. 2015년에는 남면 화태리와 돌산읍 신복리를 연결하는 화태대교가 완공됐다.

금오열도에서 가장 큰 섬인 금오도에는 매봉산·옥녀봉·망산 등이 있다. 함구미에서 대유까지 약 2km는 200m 이상의 산지로 구성되어 있어 심포까지 이어지는 비렁길은 남면의 대표적 관광자원이다.

남면의 높은 산지가 없고 지형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하천은 두모리의 두모천을 제외하고 발달하지 못했다. 두포와 모하 마을은 작은 하천에 흐르는 물을 둑으로 막아 두모제와 모하제 두 저수지를 만들고 그 물을 이용해 벼농사를 짓고, 다슬기와 참게를 양식하고 있다.

▲여수시 남면 연도의 해식동굴 '코굴' (사진=EBS1)
▲여수시 남면 연도의 해식동굴 '코굴' (사진=EBS1)

섬으로 구성된 남면에서는 해식애, 파식대, 해식동, 씨 아치 등 다양한 해안 침식 지형을 볼 수 있다. 파랑의 침식에 의해 발달·유지되는 바닷가 절벽인 해식애는 금오도의 미역널방, 해식동인 연도의 코굴, 씨 아치인 연도의 코끼리 바위 등이 대표적이다.

남면의 섬과 섬 사이는 예로부터 교통로로 이용됐던 물길을 이루고 있다. 돌산과 화태·횡간도사이의 횡간수도, 금오도와 월호·두라·화정면 개도 사이의 금오수도, 금오도와 안도 사이의 안도수도, 안도와 연도 사이의 연도수도 또는 신강수도가 있다.

1454년 간행된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순천도호부에 속한 섬으로 돌산·개도·금오도를 기록하고 있다. 1789년 작성된 『호구총수』의 여수면 하도에 지금의 남면에 속한 횡간도·안도·소리도·두리도·수태도의 땅이름이 나타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전라남도 여수군 남면, 1949년 여천군 남면, 1998년 4월 1일 여수시 여천시. 여천군 통합으로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이 됐다.

2020년 남면의 인구는 1696세대로 2953명이 거주하고 있다. 세대별 평균 인구는 1.7명으로 여수시 전체 인구 1%에 해당한다. 1980년부터 1995년 사이 여천군의 인구 가운데 남면이 차지하는 비율은 평균 12.3%였다. 하지만 1995년부터 인구는 지속해서 감소했다. 이러한 현상은 농업과 수산업, 양식업 등 주로 1차 산업에 바탕을 두고 있어 생산 기반시설 약화에 따른 경제적 측면과 더불어 자녀 교육을 위한 이촌 향도 현상에 의한 전출, 즉 인구의 사회적 감소와 낮은 출산율 및 노령화 등이 결합했다.

남면은 금오도·안도·연도·두라도·화태도·횡간도 등 모두 섬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9개의 법정리로 25개의 행정리가 분포하고 있다. 즉 남면에서 가장 큰 섬인 금오도에는 우학리, 심장리 등 4개의 법정리에 우리의 내외진·우실·모하와 같은 행정리가 14개가 있고 기초 단위인 자연 마을이 50곳 이상 분포하고 있다.

▲여수시 남면 안도 신석기 시대의 조개더미의 발굴 현장 모습 (사진=디지털여수문화대전)
▲여수시 남면 안도 신석기 시대의 조개더미의 발굴 현장 모습 (사진=디지털여수문화대전)

● 선사 시대

남면 금오도와 안도를 잇는 연도교 공사에 따라 안도 조개더미 유적이 훼손될 위기에 처하자 국립광주박물관에서 2007년 1월 2일부터 4월 6일까지 약 90일간 발굴 조사했다. 조사 구역 내에서 무덤 2기 불 땐 자리와 움집 유구가 각각 7곳 등이 확인됐다. 무덤은 얕은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묻은 뒤, 조개껍질이 섞인 흙으로 덮은 묘로 추정됐다. 이 가운데 1호 무덤은 하나의 구덩이에 2구의 사람 뼈가 하늘을 보며 나란히 놓인 모습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확인된 장례 제도로 보인다. 또 사람 뼈에 조가비를 가공한 팔찌를 낀 상태로 발견됐다.

이 유적에서 귓불에 구멍을 뚫어서 걸게 만든 고리 모양의 동근 귀고리 1점이 출토됐다. 이러한 귀고리는 중국 동북부와 연해주, 그리고 일본 열도 등 주로 해안과 도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신석기시대 대표적인 장신구 가운데 하나이다. 움집은 돌을 채운것과 조개껍질을 채운 것이 있는데 불 땐 자리는 크기가 다른 7곳이 확인됐다. 조개껍질이 쌓인 층에서 콩알무늬 토기·덧무늬토기·손가락 끝으로 무늬를 새긴 토기·눌러찍은무늬 토기·붉은칠 토기·무늬없는 토기 등이 출토됐다.

2007년 3월 27일 현장 설명회가 끝난 뒤 유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2구의 사람 뼈가 추가로 발굴됐다. 이 가운데 3호 사람 뼈에서 팔목에 5개의 조가비 팔찌를 끼고 있는 것이 확인돼 4월 24일 설명회가 다시 열렸다.

▲남북국시대 전라남도 여수를 거쳐 간 입당구법순례행기를 지은 일본인 승려. (사진=여수시)
▲남북국시대 전라남도 여수를 거쳐 간 입당구법순례행기를 지은 일본인 승려. (사진=여수시)

● 근대 이전 사회

남면과 관련된 사료는 통일 신라 시대 일본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가 가장 빠른 것으로 보인다. 중국 당나라의 불교를 배우기 위해 선발된 일본 승려 엔닌은 838년 6월 13일 당나라에 파견될 사신의 배를 타고 하카타만을 출발하여 귀국할 때까지 9년 이상을 여행한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847년 9월 6일부터 8일까지의 기록이 담겨 있다.

기록에 따르면 엔닝 일행이 잠시 쉬었던 안도는 지금의 남면 안도로 당시 국가에서 말을 기르던 목장이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서남쪽으로 ‘탐라’ 즉 제주도가 보인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산지』의 기록처럼 안도 상산에 올라가면 맑은 날 제주도를 볼 수 있어 엔닌이 지금의 안도에 잠시 들렀음을 알려준다.

함구미 마을 뒷산에는 6000여 평쯤 되는 넓은 평지가 있는데, 산봉우리 바로 밑을 사람들은 ‘절터’라 부르고 있다. 이어 절터에 대한 전설도 내려오고 있다. 전설은 보조국사가 모후산에 올라가 좋은 절터를 찾기 위하여 나무로 조각한 새 세 마리를 날려 보냈는데, 한 마리는 순천 송광사 국사전, 한 마리는 여수 앞바다 금오도, 한 마리는 고흥군 금산면 송광암에 앉았다고 한다. 이것을 삼송광이라 부른다고 한다.

1899년 돌산 군수 서병수가 편찬한 『여산지』에 “1195년 보조국사 지눌이 남면 금오도에 절을 짓고, 이름을 송광사라고 했다”라는 기록을 통해 볼 때 함구미 뒷산의 절터는 송광사의 옛터로 추정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약 20년 뒤인 1617년 쓰인 『광해군일기』에는 조선 시대 화태도에서 항암제이자 고혈압 치료제 등의 약재로 이용됐던 뽕나무 겨우살이가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남면 지역에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1777년 안도에서는 태풍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해 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가슴 아픈 사연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남면 지역에서는 ‘경신 대화재’라 부르며 300세대 가운데 한 채만 남기고 마을이 모두 불탄 사건이 1860년에 발생했다. 1860년 3월 안도에 들러 ‘안도의 여인’이라는 시를 썼던 김윤식이 20년 뒤인 1880년 순천부사가 되어 조정에 올린 장계에 따르면 1880년 6월 29일 일어난 사건으로 그때가 경진년이었기 때문에 ‘경진 대화재’라고 해야 할 것 같다고 안도의 여인이라는 시를 실었다.

조선 시대 금오도는 궁궐을 짓거나 보수할 때 임금의 관을 짜거나 판옥선 등의 전선을 만들 재료인 소나무를 기르고 가꾸던 황장봉산이었다. 또 조선시대에는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금오도를 지키기 위해 섬을 비워 두는 것과 황장목의 관리와 개발을 통해 세금을 걷는 문제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다. 1725년 금오도 개발이 영조에 의해 허가됐다.

영조가 금오도에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허락한 이후 논밭과 집을 팔아 섬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수백 호에 달하였으나 황장목의 보호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섬을 비워 두자는 의견이 강하게 나타남에 따라 금오도는 다시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이 됐다. 따라서 금오도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던 많은 사람이 전 재산을 잃었다.

황장봉산이었던 금오도는 전라좌수영 관할 아래 방답진에서 관리하고 있었으나 1865년 9월 태풍 때문에 소나무들이 거의 쓰러져 버려 봉산으로서의 기능을 잃게 되는데 이 나무들은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활용했다. 사람이 살지 못했던 금오도에 다시 사람이 들어가 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로 이는 이주회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워 연일현감이 되었고 그 후 외무위원까지 올랐는데, 이때 김옥균, 우범선 등과 친교를 맺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이주회는 아무 관련이 없으면서도 김옥균과의 친교로 화를 입을까 두려워 1885년 일본으로 도망쳐 도쿄 간다 묘진시 부근에서 와타나베라는 사람의 딸과 동거생활을 하였다. 그가 그린 서화를 여자가 밖에 내다 팔아 근근이 먹고 살다 금오도로 들어왔다.

1865년 태풍 때문에 봉산으로서 기능을 잃은 금오도는 1884년 봉산이 해제되어 좌수영 소유지가 되자 막장이었던 이주회의 건의에 따라 1885년 일반인에게 개간을 허가했다. 이주회는 금오도에 형 이제영과 가족을 데리고 가서 개간 사업을 벌였는데 이 사업에 가렴추구를 피해 들어온 여수 지역의 농어민들을 동원함으로써 4개 마을 600여 호로 번창했다.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 이야포 사건은 1950년 8월 3일, 통영에서 출발해 여수 안도에 도착한 피난선이 미군 항공기의 총격을 받았다. 현재까지 알려진 피난민 수는 350여 명인데 이 가운데 150여 명이 숨졌고 50여 명이 다쳤다. (사진=뉴스탑전남)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 이야포 사건은 1950년 8월 3일, 통영에서 출발해 여수 안도에 도착한 피난선이 미군 항공기의 총격을 받았다. 현재까지 알려진 피난민 수는 350여 명인데 이 가운데 150여 명이 숨졌고 50여 명이 다쳤다. (사진=뉴스탑전남) 

● 현대 사회

1950년 8월 7일 남면 횡간도와 금오도 사이에 있는 ‘두룩여’ 사이의 바다에는 전날 조기떼가 나타나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날 돌산도와 횡간도 화태도·금오도·개도·제리도 등 여러 섬에서 백 여 척의 배가 모여 이른 아침부터 조기 낚시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날과 달리 조기가 많이 잡히지 않자 정오 무렵부터 일부 배들은 철수했다. 이때 돌산도 부근에서 미군 전투기가 나타나 낮게 날며 정찰 비행을 하면서 남면쪽 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 다시 비행기 소리가 나더니 조기배들을 향해 기총 소사를 실시했다. 전투기가 세 번 지나간 바다에는 사람들이 흘리는 피로 붉게 물들었고 어떤 이는 총탄에 목이 날아가 버려 배 위에는 목이 없는 시신이 걸쳐 있기도 했다.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이 살육으로 인해 화태, 횡간도를 비롯해 돌산 군내리와 신기 마을 사람 가운데 목숨을 잃은 사람은 12명, 5명이 다쳤다. 2000년 부산에 살고 있던 이춘송 씨가 1950년 8월 3일 안도 이야포에서 미군 전투기의 기총 소사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증언함으로써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가슴에 담고만 있어야 했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증언자의 부모님과 두 동생을 포함한 140~150여 명의 민간인이 이 사건으로 희생됐다. 사고 당시를 경험한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1차 기총 사격이 끝난 뒤 마을 사람들이 부상 당한 피난민들을 구하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가 한참 구조 작업을 하고 있을 때 또다시 미군 기가 나타나 기총 사격을 함으로써 마을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1살의 나이로 안도 이야포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아 미국으로 건너간 뒤 워싱턴의 한인회장까지 지낸 윤학제 씨는 섬에서 자신처럼 가족을 잃은 소녀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는 방법으로 수필집을 냈다. 당시 희생자를 300여 명으로 밝히고 있다.

▲금오도와 안도를 잇는 안도대교. (사진=광주둘레길동호회)
▲금오도와 안도를 잇는 안도대교. (사진=광주둘레길동호회)

● 삶과 변화

2010년 열린 금오도 비렁길은 해식애와 파식대 ‘통’이라고 불리는 협곡 등의 해안 침식 지형과 직포 해수욕장과 같은 해안 퇴적 지형, 겨울에도 온화한 기후와 울창한 난대성 식물을 비롯해 다양한 해산물, 방풍 등 특화 작물이 어우러진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역으로 2011년 전라남도와 전남발전연구원에서 남도문화생태탐방로 대표길, 2012년 행정안전 부로부터 ‘우리마을 녹색길 BEST 10’으로 지정됐다.

안도대교는 2005년 안도와 금오도를 잇는 연도교로 교량 길이 360m, 폭 12.5m, 1.76km의 인접 도로가 건설되었는데, 2010년 공식 개통됐다. 화태대교는 돌산읍 신복리와 남면 화태도를 연결하는 총 길이 1345m의 사장교로 2015년 개통됐다. 남면 지역에 금오도 비렁길, 금오도-안도, 돌산-화태도 간 연도·연육교 개통, 도로의 확·포장, 차를 실을 수 있는 여객선 항로의 증설 등 관광객의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민박집, 펜션 등이 늘어나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됐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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