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단 설립 논의가 필요하다]⑤-1 문화예술 도시는 하드웨어 인프라만 갖춘다고 이뤄지는 게 아니다. 문화예술과 문화예술인들의 인권과 복지는 물론 문화예술사 정립 등 사람과 역사를 예우하는 기본부터 탄탄하게 갖춰나가야 한다.

왼쪽부터 김홍식, 배동신, 류경채, 박노식, 박보운, 지정익, 정홍수, 윤형두, 허영만, 손상기, 김정수, 류인 (출생 순)
왼쪽부터 김홍식, 배동신, 류경채, 박노식, 박보운, 지정익, 정홍수, 윤형두, 허영만, 손상기, 김정수, 류인 (출생 순)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여수 출신이거나 여수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작품 활동을 하다 작고한 작가 5명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전남 최초의 서양화가이며 선구자인 김홍식(1897~1966) 화백, 추상회화의 대가인 류경채(1920~1995) 화백, 여수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말년에 여수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 생을 마감한 한국 수채화의 거장 배동신(1920~2008) 화백,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절망을 예술로 승화시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 손상기(1949~1988) 화백 등이다.

추상과 설치작업이 지배적이던 1980년대 한국 화단에서 인체를 매개로 한 작품으로 한국 구상조각에 큰 획을 그은 천재 조각가로 불리는 故 류인(1956∼1999)도 있다. 류인은 류경채 화백의 아들이다. 현재 예울마루에서 열리고 있는 류인 기획전은 애초 지난 20일까지였으나 반응이 좋아 한 달간 더 전시하기로 했다.

박노식(1930~1995)은 여수서초등학교 32회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액션 영화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배우이다. 주연작은 300여 편, 조역과 단역 출연작까지 포함할 경우 700여 편에 이른다.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와 호쾌한 액션, 독특한 표정 연기로 한국영화의 중흥과 쇠퇴를 같이 한 한국영화사의 역사이기도 하다.
 

손상기 作 공작도시-영원한 퇴원, oil on canvas, 150x112cm, 1986-t
손상기 作 공작도시-영원한 퇴원, oil on canvas, 150x112cm, 1986-t

문학인으로 박보운(1931~2009)과 김자환(1952~2008)이 있다. 박보운은 여수공고와 조선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55년 엄심호, 김용태 등과 함께 〈여수문학〉의 전신인 〈여항〉을 발간해 여수문학의 산증인으로 평가받는다. 김자환은 순천 출신이지만 광주교대를 졸업한 후 여수 초도초, 율촌초, 북초, 구봉초, 여도초 등 30년을 넘게 여수지역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활동한 동화 작가다. 주로 장편동화를 즐겨 썼으며 특히 아름다운 항구 도시 여수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썼다.

여수 음악사에 큰 획을 그었다는 지정익(1931~2009) 박사는 광주 출신으로 안과의사가 되면서 1964년 여천보건소장으로 부임, 여수와의 인연을 맺었다. 특히 한센병 환자들에게는 새로운 생명을 준 여수의 슈바이처로 각인돼 있다. 지 원장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고 한다. 1970년 베토벤 탄생 200주년 레코드 감상회를 계기로 71년 여수시립합창단을 창설했고 74년 호악회 오케스트라를 구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예총회장, 호악회 회장, 여수 필하모니 단장, 시민회관 건립추진위원을 맡았다.

한국 국악계와 향토문화예술계의 거목으로 알려진 정홍수(1932~2018) 전 한국국악협회 전라남도 지회장(전 한국예총 여수지회 고문)은 자신이 발굴 재현한 현천 소동패놀이가 1982년 5월 전라남도 제7호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예능 보유자가 됐다.
 

 

정홍수 회장은 자신이 발굴 재현한 현천 소동패놀이가 1982년 5월 전라남도 제7호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예능 보유자가 됐다.
정홍수 회장은 자신이 발굴 재현한 현천 소동패놀이가 1982년 5월 전라남도 제7호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예능 보유자가 됐다.

디지털여수문화대전에 따르면 1980년 이후 사단법인 향토민속문화보존회를 이끌면서 한국국악협회전남지부(예총국악협회) 초대 지부장과 한국국악협회 여수지부장을 맡아 호남의 문화예술계를 지켰다. 2007년 이순신 장군이 출정을 앞두고 군기를 세워놓고 지낸 ‘둑제’를 국보 304호 진남관에서 재현해 문화관광부 전통예술 복원 1호로 기록됐다. 현천소동패놀이와 영당 풍어굿, 순천 운곡 대보름 액맥이 굿 등은 대통령상을 받아 보존되고 있다. 전남도는 2016년 현천 소동패놀이 영상 기록화 사업을 추진해 전남 지역 공공 도서관과 대학, 문화 관련 단체 등에 배포했다. 정 회장이 발굴 재현한 민속놀이는 수십 편에 이른다. 여수시는 2020년 정 회장 유족으로부터 넘겨받은 녹음테이프 자료 등을 디지털화 해 보관하고 있다.

한국 출판계 거목 윤형두 범우사 대표는 여수시 돌산읍 우두리 출신이다. 윤 대표는 지난 2015년 모교인 순천대박물관에 국보급 유물인 고려시대 초조대장경(대반야바라밀다경 제565권)과 재조대장경(대방광불화엄경 제54권) 인쇄본을 기증했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인쇄본은 고려 현종 2년(1011)에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판각을 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 인쇄본이다. 초조대장경은 1232년 몽고군 침입으로 모두 소실돼 당시 인쇄본은 매우 희귀하면서도 문학적 가치가 높다.

재조대장경 인쇄본은 목판이 8만여 개에 달해 팔만대장경으로도 불린다. 국보 제32호로 현재 해인사에 소장된 목판본의 인쇄본으로 초조대장경 소실 이후 당시 집권자인 최우 등을 중심으로 16년 만에 완성해 다시 판각했다는 의미로 재조대장경이라고 불린다. 윤 대표는 지난 2014년 조선시대 금속활자본 66권을 기증한 바 있다. 윤 대표는 이외에도 1985년부터 순천대도서관에 각종 도서 2만 2000여 권을 기증해 왔다. 여수에 박물관이 있었다면 유물들을 여수로 가져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윤 대표는 고향 여수에도 많은 책을 기증했다.

허영만 화백의 전시회 ‘허영만展 : 창작의 비밀’이 지난 2015년 9월 22일부터 11월 29일까지 예울마루에서 열렸다. (사진=뉴스탑전남DB)
허영만 화백의 전시회 ‘허영만展 : 창작의 비밀’이 지난 2015년 9월 22일부터 11월 29일까지 예울마루에서 열렸다. (사진=뉴스탑전남DB)
허영만 화백의 전시회 ‘허영만展 : 창작의 비밀’이 지난 2015년 9월 22일부터 11월 29일까지 예울마루에서 열렸다. 허 화백의 만화를 보고 있는 방문객들. (사진=뉴스탑전남DB)
허영만 화백의 전시회 ‘허영만展 : 창작의 비밀’이 지난 2015년 9월 22일부터 11월 29일까지 예울마루에서 열렸다. 허 화백의 만화를 보고 있는 방문객들. (사진=뉴스탑전남DB)

허영만 화백은 우리나라 최고의 만화가이자 예술가로 손꼽힌다. <각시탈>, <오! 한강>, <아스팔트 사나이>, <비트>, <미스터Q>, <날아라 슈퍼보드>, <타짜>, <식객> 등 수많은 화제작을 남겼다. 허 화백의 만화는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로 제작돼 흥행에도 성공했다. <전원일기> 김정수 작가도 여수가 고향이다. 김 작가는 <전원일기>를 비롯해 <엄마의 바다>, <자반고등어>, <그대 그리고 나>, <파도>, <그 여자네 집> 등 수많은 드라마 극본을 썼다.

소나무 사진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배병우 작가는 섬과 바다·제주 오름·창덕궁·종묘 등 한국적 정서를 담은 작품으로 유명하다. 배 작가는 여수 종화동의 창고를 매입해 여수시에 기증하고 이를 미술관으로 개조하겠다고 했으나 창고 주인이 매매를 거부해 무산된 바 있다.
 

류인 作 부활_조용한 새벽 1993 bronze iron 350x80x190(h)cm  (손상기기념사업회)
류인 作 부활_조용한 새벽 1993 bronze iron 350x80x190(h)cm  (손상기기념사업회)

<만화로 보는 한국현대사 1‧2‧3> 시리즈를 비롯해 <만화 박정희>를 시작으로 <만화 전두환>, <만화 김대중>, <만화 노무현>까지 전직 대통령의 모습을 담아 한국현대사를 재조명한 시사만화가 백무현(1964~2016) 화백도 여수 출신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지역사회의 예우는 사실 홀대에 가깝다. 문화예술 도시는 하드웨어 인프라만 갖춘다고 이뤄지는 게 아니다. 문화예술의 주체인 그들의 인권과 복지는 물론 문화예술사 정립 등 사람과 역사를 예우하는 기본부터 탄탄하게 갖춰나가야 한다. 척박한 지역의 문화예술을 일구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여수가 예술 활동의 자양분이 됐다는 점에서 이를 조명하고 문화예술에 대한 기록이 지역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요구된다.

마재일 기자 killout133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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